며칠 전 한 자선사업가가 우리 대학에서 사회 봉사상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회봉사를 하면서 신망 받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행사는 300여명이 참석하는 블랙타이의 디너 행사로 치뤄진다. 마침 우리 부부와 알고 지내는 수상자 오클리 훼리스가 우리를 초대하면서 내게 한복을 입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남의 수상식에 눈에 띄는 옷을 입고 가 주위를 끄는 일이 쑥스러웠으나, 그의 부탁이 하도 간절하여 한복을 입어 주기로(?) 했다.
시상식 날 테이블에 앉기 전에 서서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와 한복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한국인임을 아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한국의 전통의상임을 짐작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복임을 아는 것 같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창피해서 묻지도 못하는 듯하여 대화 중 넌지시 한국 옷임을 알려 주었다.
어떤 중년 여성은 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뒤에 서서 기다리더니, 자기 차례가 오자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크게 웃으면서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몇 년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때 한복을 선물 받았다며 자기 한복도 아주 멋지다고 자랑했다. 한국인들에 대해 칭찬하면서 한국이 몹시 그립다고 했다. 나도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나를 기다리는 다음 사람 때문에 아쉽게 물러나야 했다. 오클리는 그런 나를 가끔씩 옆 눈으로 보며 찡긋 웃어주었다.
26년 전 우리 부부는 서류 상 문제로 본 결혼식을 하기 몇 달 전, 같은 목사님의 짧은 주례로 증인 두 사람과 작은 결혼식을 먼저 올렸다. 본 결혼식에선 서양 드레스를 입으니까 한복을 입기로 했는데, 마침 여동생이 자기도 아직 개시 안한, 하얀 모시에 동양화가의 손 그림이 그려진 새 한복을 선뜻 빌려주었다(아직도 무척 감사하다). 한복을 향한 목사님과 친구들의 감탄 속에 식을 간단하게 마친 우리는 프랑스 식당에 갔다.
식당의 많은 사람들이 옷이 아름답다며 감탄의 말을 끊임없이 전했지만 아무도 한복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앞섶의 고름을 보고는 리본의 귀 하나가 풀어졌다며 고쳐주려고까지 했다. 일본의 기모노와 중국의 치파오는 잘 알아보면서 한복을 못 알아보는 미국인들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책임이 많다 싶어,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옷임을 확실히 알렸다. 그들은 알려준 것에 감사해하더니 본격적으로 호기심을 보이며 음식 등 또 다른 한국문화에 대해 물었다.
미국 이민자들 중엔 인도사람들이 가장 많이 전통의상을 입고 지역행사에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들을 보면 주목을 끌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함께 나누는 모습으로 비춰져 더욱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 느낌에 용기를 얻는 나는 그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복을 입어 왔다. 아이 학교의 행사, 직장의 행사, 한국학교 행사, 국제적 지역행사, 지역의 특별행사 등. 때론 다림질 등 준비가 복잡하고 입은 후에도 다니기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또 한 사람 미국인에게 보여 주면 언젠가 한복도 기모노와 치파오처럼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국적을 찾게 되리라는 생각에 기꺼이 입었다.
그 날 시상식이 끝난 후, 오클리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우리를 보내주지 않고 계속 옆에 붙들어 두었다. 모두가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어서 자신의 특별한 날이 더욱 특별하게 되어 기쁘다며 한복을 입어 주어서 고맙다고 정식으로 감사의 말을 했다. 그에겐 한국전쟁 최악의 전투였던 저격능선 전투에서 휴전협정 며칠 전에 전사한 형이 있다. 그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다음 달에 형의 동상 제막식이 있을 예정이다. 그만큼 사랑했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과 큰 가슴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형의 전사로 가슴 속 어딘가에 한국에 대한 미움을 담아 두고 있지만 내 앞에선 숨기는 게 아닐까 막연히 의심해왔던 내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나 같은 사람도 이처럼 한국문화 전파에 앞장을 서니 너는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채찍질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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