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Jim)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그와 동행하는 미시시피 현지공장 출장 건이었다. 일주일 출장 계획을 잡아보았으니 내 형편에 맞는지 검토해보고 회답해 달라는 것이다.
달력을 보니 출장 가는 주 토요일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한 친지의 며느리 베이비샤워에 초청받은 날이었다. 출장 명령이 떨어지면 찍소리 한번 못하고 떠나던 한국의 직장생활이 떠오르며 하찮은 개인적 사유로 일정을 바꾸자고 하기가 영 마음에 걸렸다.
잠시 망설이다 베이비샤워 때문에 출장 일정을 일주일 늦췄으면 좋겠다고 짐에게 답신을 보냈다. 짐은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항공편 예약 등 모든 준비는 짐이 처리할 일이었다.
출장이 다가오자 정서와 취향이 다른 전형적 미국 백인인 짐과 일주일을 함께 보낸다는 사실이 부담스레 느껴졌다. 그러나 출발 며칠 전 짐은 존 웨인 공항 주차안내를 비롯해서 현지 날씨에 맞춰 준비해야 할 옷 등에 대해 자상히 조언해 주었다. 그와의 출장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이 차차 걷히기 시작했다.
지난 해 10월 중순, 우리는 존 웨인 공항에서 만나 출장길에 올랐다. 5시간쯤 댈러스를 거쳐 멤피스로 날아가 자동차로 1시간 30분 달려가는 출장이었다. 현지공장은 전원풍의 한적한 도시 리플리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짐의 서비스는 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탑승권을 발급 받는 일에서부터 음료와 스낵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나를 챙겼다. 짐은 마치 내가 자신의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세심하게 마음을 썼다. 고맙다고 하면 오로지 “유어 웰컴”이었다.
댈러스 국제공항에서 내 눈에 든 것은 구두닦이였다. 내가 한국의 ‘슈샤인 보이’에 대해 이야기하자 짐은 미국의 ‘슈샤인 맨’을 체험해보라고 제안했다. 나는 높은 의자에 앉아 나이 지긋한 흑인 ‘슈샤인 맨’의 흥겨운 콧노래를 들으며 구두를 닦았다. 미국에서 처음 닦아보는 구두였다. 요금과 팁은 짐이 지불했다.
멤피스 공항 근처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대여했다. 공항에서 리플리까지는 80마일이다. 그때까지 짐이 베푼 도움과 호의에 대한 답례로 내가 핸들을 잡으리라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짐이 자동차 열쇄를 받아들고 운전석을 차지했다. “내 운전 실력 믿지?” 하며 나에게 피곤할 텐데 잠시 눈이나 붙이란다.
공장이 자리 잡은 리플리는 숙박 시설을 찾기 힘든 인구 5천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이다. 우리는 회사가 본사 직원 숙박용으로 구입한 큰 주택에 여장을 풀었다. 이 주택에서 나흘간 머물며 현지공장까지 10여 마일을 짐이 매일 운전하는 차로 출퇴근했다. 차에 개스를 넣을 때도 그는 나의 도움을 사양했다. 일찍 일어나 아침 커피를 준비하는 것도 그가 기꺼이 맡은 일과의 하나였다. 식사는 현지공장 직원들이 추천한 식당을 찾아다니며 해결했는데 짐은 매번 나에게 메뉴에 대해 미리 브리핑해 주었다.
나는 짐의 몸에 밴 봉사로 그와의 출장을 아무런 불편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출장 전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은 모두 짐에 대한 감사와 존경으로 바뀌었다. 자가용 기사처럼 때론 수행비서처럼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준 짐은 회사 최고경영자인 바로 사장이다.
요즘 한창 한국에서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이른바 ‘갑과 을’의 문제를 접하고 사장 짐과의 출장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을’인 내가 ‘갑’인 사장을 모시고 출장을 나섰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불을 보듯 환히 머릿속에 그려진다.
강자와 약자로 대변되는 ‘갑과 을’의 문제는 의식구조의 문제여서 법적 규제만으로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이 쉽게 제어되지 않는다. 아무리 경제나 정치의 민주화를 외쳐대도 생활의 민주화가 되지 않고는 ‘을’을 향한 ‘갑’의 횡포나 지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의 기반 위에 세운 삶의 한 방식 아닌가. 한국도 선진국 소리를 들으려면 짐과 같이 ‘을’을 배려하는 봉사정신이 몸에 밴 ‘갑’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추신: 짐은 하루 8시간 근무 중에는 나의 상사로서의 위치를 엄격하게 지켰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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