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1-2-3 of God or the three faces of Spirit basically mean that Spirit can be approached in first-person or second-person or third-person perspective.
신(神)의 하나-둘-셋 또는 영혼의 세 얼굴, 이는 곧 영혼이 1인칭 또는 2인칭 또는 3인칭으로 접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늘 ‘실존의 바탕’을 얘기하는 저에게 혹자는 묻습니다.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우선 한바탕 웃습니다. 하하하! “불자(佛子)시죠?” “가톨릭이신가봐요?” “크리스천 맞죠?” “아아, 요가 수행자 아니세요?” 다 아니고 다 맞습니다. 그럼 또 묻습니다.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또 웃습니다.
일지(一指) 선사 흉내를 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입니다. ‘실존의 바탕’[the Ground of Being]을 어찌 말로 풀리오? 불립문자요 교외별전이니 직지인심으로 호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성이 아닌 직관에 호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불립문자의 경지를 21세기 인류 지성에게 짧게 설명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영혼의 세 얼굴’이란 방편이죠.
문법 시간에 1인칭/2인칭/3인칭에 대해 배운 바 있습니다. 1인칭은 말하는 ‘나’입니다. 2인칭은 내 말을 듣는 ‘너’ 그리고 3인칭은 ‘나’와 ‘너’가 말하는 ‘그/그녀/그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셋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신(神)과 영혼을 이 세 가지 입장에서 접근해 보자는 게 바로 켄 윌버(Ken Wilber)의 삼위일체 아이디어입니다. 말과 글 너머 ‘실존의 바탕’[the Ground of Being]인 영혼. 자, 이제 그 ‘바탕’의 진면목을 ‘The 1-2-3 of God’로 새겨 볼까요?First-person Spirit is the great “I AM,” the pure radical subjectivity or witness in every sentient being.
1인칭 영혼은 위대한 "아이 엠!"으로서 이는 순수하고 근본적인 주관이요 모든 중생 안에 있는 목격자인 것이다.
참선하는 스님들이 추구하는 게 바로 "I AM"입니다. 아트만 속에 내재하는 브라만을 깨닫는 게 ‘I AM"이죠. 형형한 불성으로 내 안에 들어있는 ‘참 나’를 주인공으로 알아채고, 부모미생전 진면목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게 바로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요기들의 Aham Brahmasmi! 아함 브라마스미! "나는 절대(絶對) 그 자체이다!" “Before Abraham was, I AM!”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다!" 바로 그 “I AM”이 1인칭 영혼입니다.
The second-person Spirit is the great “Thou,” something that is immeasurably greater than you.
2인칭 영혼은 “위대한 당신"으로 그대보다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존재이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느님."Then sings my soul, my Saviour God, to Thee; How great Thou art, how great Thou art!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바치는 흠모와 공경의 대상인 "나의 주님." 그렇게 ‘위대한 당신’[Great Thou]이 바로 2인칭 영혼입니다.
Spirit in third-person is the great Web of Life, the Great Perfection of everything that’s arising.
3인칭 영혼은 저 위대한 ‘생명의 망(網)’이요 생겨나는 모든 것의 ‘위대한 완성’이다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와 공(空) 안에 편재하는 신(神). 떨어지는 나뭇잎 속에도, 타오르는 불길 속에도,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저 바람 속에도, 그 어느 대상에도 두루 계시는 영혼이 바로 3인칭 영혼입니다. ‘생명의 망(網)’은 ‘부분의 합을 넘어선 전체’를 말합니다. ‘시스템’ 전체 안에 두루 계신 하느님/하나님이 바로 영혼의 3인칭 모습입니다.
이렇게 ‘신(神)의 하나-둘-셋’ 모습과 영혼의 세 얼굴을 살펴 보니, 특별히 어느 모습이 다른 모습보다 낫거나 못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요, 본질은 하나이건만!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서로 다른 세 얼굴이 모두 같은 ‘실존의 바탕’[the Ground of Being]임을 알아챈 이상, 이젠 선택한 ‘한 길’로 꾸준히 걸을 뿐입니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런데, 산 ‘저쪽 길’을 걸어 정상에 오르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가엾게 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어차피 정상에서 만날 사람들이니까요.
자, 정체불명의 이 사람 속내를 조금 미루어 아시겠는지요? 불자들과 반야심경을 외우고, 성당 식구들과 묵주기도를 드리며, 교회 친구들과 기쁘게 찬송과 찬양을 합니다. 전혀 어색하거나 꺼림칙하지 않습니다. 바탕이 같으니까요. 그리고, 그 바탕은 결국 ‘고요함’[stillness] 속에 ‘하나’란 걸 아는 터입니다.
Many paths, one summit! 오르는 길은 많아도 정상은 하나. 길은 많지만 ‘한 길’로 오르긴 해야 정상에 다다릅니다. 그리고, 그 ‘한 길’은 ‘고요함’[stillness]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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