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미국방문 피날레를 엉뚱한 사람이 장식했다. 날아갈 듯 화사한 한복 ‘패션외교’, 우호적 분위기의 한미 정상회담,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최고’라는 평까지 받은 ‘또박또박’ 영어연설 등 공들이고 준비한 만큼 성과를 거둔 박 대통령의 미국방문이 한순간에 빛을 잃었다.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사건이 먹칠을 했다.
사건이 터진 지난 8일 새벽부터 9일 아침 윤 대변인의 경질까지 여러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대통령 수행하느라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야 정상인 대변인이 밤새 술을 마시고,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그것도 60 바라보는 나이에 21살 여대생을 성추행했다는 보도들은 선뜻 믿기 어렵다. “설마?” 싶은 게 사실이다.
이를 믿게 만드는 것이 이어진 일련의 사태이다.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려고 수행한 대변인이 도중에 짐도 안 챙기고 귀국하고, 대통령이 해외에서 보좌관을 전격 경질한 것은 이제까지 없던 일들이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보여준다.
‘라면 상무’ 사건, 남양유업 직원 욕설 사건, 윤창중 성추문 사건 - 지난 3주 동안 매주 한건씩 사건이 터지고 있다. 패러디 잘 만드는 한국의 네티즌들은 윤창중이 남양유업 우유 마시며 라면 먹는 사진을 합성해냈다.
이들 사건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 온라인 소셜네트웍이 터트린 사건이다. 이전 같으면 사적 영역에 묻혀있을 수도 있었을 사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터지면서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뒤흔들어 놓았다. 유사한 사건들이 계속 터진다는 것은 어떤 시대적 흐름의 징후일 수 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공포영화가 있었다. 고교를 갓 졸업한 친구 네명이 독립기념일을 맞아 바닷가로 놀러갔다가 악몽 같은 사건에 부딪치는 내용이다. 운전 중 사람을 치지만 모두의 장래를 생각해 시체를 바다에 유기한다. 그리고 1년 후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편지가 날아든다.
온라인 소셜네트웍이 등장하기 이전인 1997년 영화이다. 지금 같으면 당장 그날로 ‘네가 한 일’을 세상사람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공분을 살만한 사건은 사적 영역에 남아 있기가 힘든 환경이다. 클릭 하나로 사건을 공론화할 무기를 우리 모두 손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반되는 문제가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다.
최신 발명품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처음 나온 것은 미국에서 120여 년 전이다. 지금은 고전이 된 법률 에세이 ‘프라이버시 권리’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루이스 브랜다이스 전 연방대법관은 1890년 하버드 법대 동창과 함께 쓴 이 에세이에서 개개인이 타인의 간섭 받지 않고 자기 생활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문제가 된 첨단기기는 카메라였다. 휴대용 카메라가 처음 등장하고 여기에 황색저널리즘이 합세해 가십성 사진과 기사들이 판을 치는 현상을 그는 지적했다. 당시 카메라가 프라이버시 침해의 권총쯤 된다면 요즘의 온라인 소셜네트웍은 핵폭탄 수준이다. 엄청난 힘이 네티즌들의 손에 담겨 있다. 이 힘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터넷 시대의 숙제이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은 네티즌들이 불의한 강자를 심판대에 올린 구도이다. 일종의 민중의 힘이다. 남양유업 케이스는 SNS의 위력이 아니었으면 거의 터지지 못할 사건이다. 하청 대리점주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는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주에게 30대 초반 영업직원이 온갖 막말을 하고 욕설을 퍼붓는 음성파일이 유튜브에 오르면서 빙산의 일각이 드러났다. 2분45초짜리 파일이 일파만파 불매운동을 일으키자 당황한 남양유업은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윤창중 성추행 의혹도 처음 표면에 드러난 것은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미시 USA에 사건 개요와 함께 “이대로 묻히지 않게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게시물이 뜨면서 언론들이 취재를 시작,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SNS 시대는 프라이버시라는 안락한 울타리를 포기해야 하는 시대이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행동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 구글 글래스 등 첨단기기들을 두고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이 일자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말았으면 싶은 건 애초에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우리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거리낄 것 없는 행동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행동을 조심한다면 세상은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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