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 갑자기 ‘유명’해진 인물이 있었다. 포스코 계열회사인 포스코에너지의 한 임원이다. 19세기 영국시인 바이런이 “어느날 아침 일어났더니 내가 유명해져 있더라”고 한 말을 21세기의 그는 지금 뼈에 사무치게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일명 ‘기내 라면사건’이 알려진 후 네티즌들은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 그를 모델로 한 광고 패러디까지 만들었다. 네티즌의 레이더에 걸렸다하면 숨을 곳도 피할 길도 없는 것이 소셜네트웍 시대 우리의 운명이다.
‘라면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이곳에서도 사람들 모이는 곳 마다 화제가 되었다. “그런 사람이 임원이라니 포스코의 망신이다” “요즘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있나?” “승무원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 모두가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사건은 문제의 임원이 지난 15일 미국 출장을 위해 인천 출발 LA행 대한항공 여객기에 탑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여행이 그에게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통로가 되고 말았다.
비즈니스 석에 탄 그는 옆자리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비롯, 매사에 심기가 불편하던 중 밥과 라면 등 기내식 서비스에 대한 불만으로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밥이 설었다”며 라면을 끓여오게 하고 라면을 가져오면 “덜 익었다” “너무 짜다” 며 계속 퇴짜를 놓고, 나중에는 “너 왜 라면 안줘? 나 무시해?”라고 분통을 터트리며 손에 들고 있던 잡지책으로 승무원의 눈두덩을 때렸다고 한다. 승무원 폭행혐의로 신고된 그는 LA공항에서 미국 입국을 못하고 그대로 귀국했다.
조용히 묻히는 듯하던 ‘라면 사건’은 지난 21일 갑자기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임원이 기내에서 한 일거수일투족을 순서대로 세세히 적은 글이 온라인에 오르면서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네티즌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가 상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라면 상무’로 불리기 시작했고, 라면 입맛 까다롭다는 조롱과 함께 ‘라면 소믈리에’라는 별명도 붙었다.
기업 이미지에 공을 들여오던 포스코는 파문이 걷잡을 없이 커지자 즉각 사과문을 발표하고 해당 임원을 보직 해임함으로써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네티즌들에 의해 이름이며 얼굴, 가족들까지 다 밝혀진 그 임원은 라면 투정 잘못 하다 상무 자리 잃고 세상에 얼굴을 들 수 없는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정당한 벌을 받은 것일까. 인터넷에 오른 그의 기내 행동들은 너무도 비상식적이다. 어린아이가 생떼 쓰는 수준인데 50대 임원이 라면 하나 먹겠다고 그런 추태를 부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여객기 승무원들 말로는 별별 꼴불견 승객들이 다 있다지만, 폭행 등 심각한 사건은 대개 승객이 술에 취한 경우에 발생한다. ‘라면 상무’가 술에 취했다는 설명은 없다.
누군가의 행동이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라면 원인은 두 가지다. 사람 자체가 막돼먹은 경우, 혹은 너무 열을 받아서 막된 행동이 터져 나온 경우이다. 대부분 네티즌들의 비난은 전자에 기초한다. 그가 온갖 망신당하고 임원 자리 잃어버린 건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소수의 의견이 없지 않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그가 승무원들의 태도에서 열을 받았을 가능성도 열어놓자는 것이다. 엘리트로서 자부심 강한 승무원들이 많은 승객들을 대하며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수준 이하로 행동하는 승객에 대해서 마냥 친절할 수만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당사자들과 일면식도 없고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우리가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 SNS 시대의 문제점이다.
정보화 시대를 맞아 우리는 정보를 확인하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시시각각 정보들은 밀려들고 삶은 복잡하니 어떤 정보든 충분히 검토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소위 ‘마녀사냥’이다.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마구 퍼나르다 보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곤 한다.
가장 최근의 피해자는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던 인도계 청년이다. 브라운 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이 청년은 용의자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SNS를 통해 신상과 사진이 마구 퍼져나가자 고민 끝에 자살하고 말았다.
인터넷에 정보가 오르면 판단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면 더욱 사실로 굳어지면서 확대 재생산되는 구도이다. 일종의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다. 거대한 여론의 파도 앞에서 피해자는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다.
‘라면 상무’가 억울한 피해자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2, 제3의 ‘라면 상무’가 나올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신상털기 등 집단적 히스테리로 희생되는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라면 상무’ 사건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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