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인심이 얼마나 야박하던지 몰라요. 음식 값은 또 어떻고요! 아이 친구를 몇 불러서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였는데, 값은 엄청 비싸면서 밥이 따라 나오지 않는 메뉴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안 되고 양도 아주 적더라고요. 한창 나이에 아이들이 얼마나 잘 먹어요. 그래서 갈비랑 떡볶이 등을 추가로 넉넉히 시켰건만 배불리 먹였다는 기분이 아니었어요.”보스턴의 명문대학에 진학한 딸을 보러 가 캠퍼스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식당이 떠올랐다. 그 식당에서 일하던 한 아저씨의 모습도 함께.
남편의 모교인 미네소타 주립대학 캠퍼스에 인접해 있는 그 식당은 이름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코리아 레스토랑.’ 작년 여름에 우연히 간판을 보고 들어가 기분 좋게 맛난 밥을 푸짐하게 먹었던 곳이다. 작고 허름한 공간의 그 식당의 한 벽에는 50여 종이 넘는 메뉴판이 붙어있었는데, 각 메뉴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입맛을 돋우는 사진이 곁들여 있어 외국인도 쉽게 고르고 주문할 수 있게 해놓았다.
모든 것이 손님 스스로 주문을 하고 번호를 받은 후 식판을 받아와 먹고 난 후에는 식판을 다시 선반 식 카트에 돌려놓아야 했다. 학교 카프테리아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주문과 계산을 하고 번호를 받아 손에 쥐고 옆에 비켜서서 우리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빈 테이블도 의자도 없었으므로) 카운터 옆에 서서 일하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키에 안경을 낀 아저씨는 반찬 한 가지 한 가지를 담아 식판에 올려놓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곧은 자세로 무슨 예식을 행하듯 절도 있게 하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밥을 받아와 먹으면서도 그 아저씨한테 자꾸 눈길이 갔다. 우리가 식당을 나올 때 까지 줄곧 같은 자세로 한눈 한 번 안 팔고 아주 중요한 업무를 보듯이 반찬을 식판에 올려놓는 일에 열중해있었다. 그것은 가히 몰입이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꼭두각시처럼 하는 게 아니고, 집중해서 명료한 의식으로 몰입한 모습에서 발산되는 조화의 에너지가 그 아저씨 얼굴에서 느껴졌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라고 한다. ‘몰입’의 저자 칙센트미하이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렇다.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이라는 뜻에서 칙센트미하이 박사는 몰입을 ‘flow (흐름)’라고 명명했다. 몰입은 흐름이라는 것이다.
어느 피아니스트는 몰입에서 오는 이 ‘flow’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연주를 할 때, 어느 순간부터 아무 생각 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이고, 거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라고. 몰입의 순간에는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경지에서는 나와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경계가 들어올 틈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바로 ‘flow’의 경지라고 칙센트미하이 박사는 말한다.
나는 그 식당 아저씨에게서 몰입의 ‘flow’를 느꼈다.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손님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면 지나친가? 몰입의 힘을 분명 터득했을 괴테의 말을 빌리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몰입하기 전까지는 망설임과 물러날 기회와 무익함이 항상 지배한다. 시작하는 모든 행동에는 하나의 본질적인 진실이 존재하나니,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넘쳐흐르는 생각과 끝없는 계획들을 죽임과 같다. 마침내 스스로 몰입하는 순간에, 하늘도 감동한다. 사물의 모든 단편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다. 세상사 모든 단편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다.”빈 테이블 하나 없이 손님으로 꽉 찬 그 식당의 좁은 공간에서 테이블마다 음식을 그득하게 펼쳐놓고 (그 식당의 그릇은 유난히 커 보였다 - 비빔밥을 담은 양푼도, 탕류의 뚝배기도, 볶음을 담은 접시도) 열심히 먹고 있는 대학생들, 갓난아기를 팔에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김이 나는 국밥을 호호 불어가며 입에 떠 넣고 있는 유학생부부로 보이는 이들, 초등학생 또래의 자식에게 생선살을 발라 입에 넣어주는 젊은 아빠도 모두 몰입해있는 듯 했다. 참 행복해 보였다. 마치 반찬아저씨의 몰입의 ‘flow’ 가 흘러나와 손님들에게 흘러들어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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