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여성독자의 전화를 받았다. 50대 중반인 그 주부는 ‘노인들의 연애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성인 자녀들이 홀로 된 노부모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너무 무심하다는 말이었다.
부모의 나이가 80, 90 되면 그 감정 밭의 지력이 쇠해서 애정의 풀 한포기 돋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생각한다’기보다 으레 그러려니 여긴다.
하지만 중년이 된 자녀들이 ‘마음만은 청춘’인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노부모의 감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노년의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 밭에도 ‘청춘’의 영롱한 씨앗이 숨어있어서 싹을 틔울 기회만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짐작이다. 몸은 늙어도 감정은 늙지 않는 것 - 사람에게 희망이자 고통이다.
앞의 주부는 시어머니가 93세의 백인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90이 넘어서 자동차를 새로 바꿀 만큼 심신이 건강하고 화장이며 헤어스타일 등 외모 관리에도 철저한 분이라고 한다. 그분이 얼마 전 “같은 교회 교인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90대 할머니의 설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처음 그는 ‘혹시 치매증상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그가 시어머니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한국의 친정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였다. 아버지와 사별한지 2년쯤 되는 80세의 어머니는 딸에게 일종의 ‘중매’ 소식을 전했다. 한 친지가 “서로 말이 통할 것 같은 점잖은 노신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해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시지만 놀라운 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였어요. 목소리가 밝고 활기가 느껴지는 게 전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머니가 겉으로는 운동도 하고 문화강좌도 들으며 바쁘게 지내지만 내면에서는 외로움이 깊었던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내 나이 80, 실버타운에서 혼자 살다 죽는 거겠지”하는 암담한 체념이다. 그런데 “어쩌면 조금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싶은 가능성이 보이자 그 가능성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삶에 활력이 되는 것으로 그는 해석했다.
“그분 만나서 같이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며 즐겁게 지내시라고 권했어요. 엄마가 앞으로 얼마가 됐든 여생을 재미있게 살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황혼의 연애감정이 작품주제가 된 것은 박완서의 단편 ‘마른 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당시 60대 후반이던 작가는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또래 노인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담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세한 내용들, 그래서 때로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는 데 그 모두를 통해 작가가 말하는 노년의 삶은 한마디로 ‘너무도 쓸쓸’ 하다는 것. 그중 한 작품인 ‘마른 꽃’은 감정이며 정서며 완전히 메말라서 서걱서걱 거릴 것 같은 노년 여성의 연애감정을 다루고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는 여성은 고속버스에서 우연히 한 노신사와 나란히 앉게 된다. 밤의 버스 안에서 두 사람은 흘러간 영화, 좋아하는 배우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년배로서의 진한 연대감을 느낀다. 대화가 통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 싹트고, 여성은 남자 앞에서 소녀처럼 들떠 재잘거리고 깔깔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여성성이 되살아 난 것이다. 흑백 화면 같던 여성의 삶은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마른 꽃’ 같던 여성의 존재에는 생기가 넘친다.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사별 후 홀로 사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홀로 사는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지금 70살이면 남성의 기대수명은 80대 중반, 여성은 80대 후반이 된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정해진 일과 없는 망망대해 같은 날들이다. 그 무료한 노년의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황혼의 연애는 단순히 외로움을 덜어주는 이상의 효과가 있다. 사랑에 빠져 가슴이 두근거리고 괜히 싱글벙글 거리는 행복감은 엔돌핀, 옥시토신 등 뇌 화학물질을 분비시켜 우울증을 예방하고 신체기능을 향상시킨다. 여성으로, 남성으로서 느끼는 성적 긴장감은 삶의 활력으로 직결된다.
홀로 된 노부모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으면 한다. 80이든 90이든 그들을 여성으로, 남성으로 보는 시각이다. 괴테나 피카소만 노년에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들어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욕망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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