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인 청중 중에는 언젠가 나의 발자취를 따를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의 배우자로 백악관 살림을 맡는 것이지요.”
20여 년 전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바바라 부시 여사가 웰슬리 칼리지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 구절이다. 명문 여자사립대학인 웰슬리 졸업연설자로 부시 여사가 초청되자 대학 내에서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일부 학생들이 반발을 했다. 평생 자기 일 한 적 없이 누구의 ‘부인’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은 여성은 그 대학이 추구하는 여성상과 맞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그런 잡음을 거치며 연단에 선 부시 여사가 위의 말을 했으니 장내가 잠시 술렁거렸을 법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 말이었다. 백악관 살림을 맡게 될 “그 남성의 행운을 빕니다!”라고 부시 여사는 덧붙였다. 대통령의 ‘부인’이 아니라 ‘남편’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평선 저 너머에 막연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던 ‘여성 대통령’을 부시 여사는 연설을 통해 닿을 듯 가까이 불러들임으로써 젊은 여성 청중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여성 대통령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고, 미국에서도 국민들의 의식 속에 여성 대통령은 들어와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오늘이라도 출마의사를 밝힌다면 그의 성별이 거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 여권운동의 선구자 수잔 앤서니는 19세기에 이미 이런 말을 했다. “신식 발명품이 물레를 사라지게 했다. 그와 똑같은 발전의 법칙이 오늘의 여성을 그 할머니 세대와는 다른 여성으로 만들었다.” 발전의 법칙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우리에게 낯설 뿐 여성 대통령의 역사는 사실 생각보다 길다. 거의 40년 전 아르헨티나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했다. 1974년 고령인 후안 페론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부통령이던 부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남편의 후광으로 자리를 이어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남미와 동남아의 여성 총리·대통령 중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혹은 남편의 이름으로 정권을 차지한 경우이다.
‘여성’으로서 사회적 편견과 싸우며 정상에 도달했다기보다는 ‘가문’의 힘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 따라서 이 때 성별은 별 의미가 없다. ‘여성’인 대통령일 뿐 ‘여성 대통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직선제에 의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1980년 아이슬란드에서 탄생했다.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가 3명의 남성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 계속 무투표 당선되면서 16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한 그는 ‘여성 대통령’이었다. 여성의 인권과 권익 향상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1985년 여권운동 진영이 임금차별 등 성차별에 항의하는 파업을 하자 그 자신도 동참해 대통령직 파업을 시도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가문과 무관하게 자력으로 정상에 오른 대표적 여성 수장들로는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이 꼽힌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맥락에서 아쉬움이 있다. 그의 대통령직이 한 여성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현실을 절감하며 쟁취한 열매는 아니기 때문이다. 성별로 ‘여성’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만도 물론 의미는 크다. ‘대통령은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최고의 유리 천정이 깨어짐으로써 여성들이 직면할 성차별의 장벽이 이전처럼 높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 각계에서 쑥쑥 두각을 나타내는 신세대 여성들에게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반면 그가 ‘여성 대통령’으로서 여성 등 소수계에 대한 배려를 정책의 우선순위에 둘 지는 의문이다.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의미 있는 것은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향상 정책을 펼침으로써 보다 공정한 사회를 이루리라는 기대가 크다. 그 첫 단추가 인선인데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은 소외되어 있다.
대선기간 그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여성 장관 비율을 대폭 확대하고 정부 각종 요직에 여성을 중용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번 조각에서 국무총리 포함 장관 후보 18명 중 여성은 2명뿐이다. 남녀 장관 수가 동일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내각까지 가지 않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첫 조각 때만 해도 19명 중 4명이 여성이었다. 박근혜 보다는 올랑드나 노무현이 더 ‘여성 대통령’인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열 자식 안 굶기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푸근함과 포용력으로 소외계층을 살피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성행복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던 약속을 지킨다면, 그는 진정한 첫 ‘여성 대통령’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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