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사별하고 혼자 지내던 선배 한분이 요즘 신이 났다. “사는 게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얼굴에 잔뜩 쓰여 있다. “사랑과 고통, 돈은 숨길 수가 없다”는 스페인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 분의 경우 숨길 수 없는 그것은 ‘사랑’이다. 노년을 함께 보낼,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난 것이다.
사랑은,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특별한 것일까. 사랑에 빠진 중장년들을 보면 사랑의 열정은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의 나이가 아니라 사랑의 나이가 중요할 뿐이다. 육체적 나이가 20살이건 70살이건 갓 사랑에 빠지면 ‘증상’이 비슷하다.
온몸에서 생기가 넘치고 행복감에 싱글벙글 하는 것이 구름 위를 걷는 사람 같다. 대뇌의 화학작용으로 쾌감을 느끼게 하는 뇌 화학물질이 마구 솟아나는 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민감하게 뇌리에 박히면서 가슴에 터질듯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불꽃의 시기이다.
문제는 그런 눈먼 사랑의 기간은 짧고 함께 살아야 할 날은 길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결혼하는 커플의 절반이 이혼으로 인연을 마감하는 것은 사랑도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사실 불꽃같은 사랑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상대방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루 24시간 같이 있고 싶어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면 사회의 기능이 마비되고 말 것이다.
심리학에는 쾌락 적응이라는 용어가 있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주던 대상이 시간이 지나면 그에 적응이 되어 시들해지는 현상이다. 꿈에 그리던 멋진 자동차, 대저택, 명품 가방 …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손에만 넣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다가도 막상 소유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동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혼 혹은 부부관계도 다르지 않다. ‘그’의 마음만 얻으면 세상을 다 얻을 것 같던 사람과 결혼에 성공해도 그로 인한 행복감은 2년 정도 지속될 뿐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다음에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소 닭 보듯’ 무덤덤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이다.
사랑도 생명이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성냥불을 대면 화르르 타오를 듯하던 정열 대신 깊고 뭉근한 정으로 사랑의 성격이 바뀐다. 부부는 연인 대신 동반자로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되는 데, 나이 들어 착 가라앉은 사랑을 어떻게 굳어지지 않게 잘 관리하느냐가 백년해로의 비결이다.
높은 이혼률로 깨어지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청소년 문제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미국에는 전국 결혼 프로젝트라는 연구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지난 1997년 럿거스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처음 시작해 2009년부터는 버지니아 대학이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부부가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중요한 요소는 너그러움이다. 넉넉하고 푸근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부부가 오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2,870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남편이/아내가 너그럽다”고 말한 사람일수록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하다’는 답변을 했다. 무슨 거창한 관용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피를 끓이고, 집안이 더러우면 나서서 청소를 하고, 상대방이 피곤해보이면 마사지를 해주고, 웬만한 실수는 문제 삼지 않는 일상적인 행동들이 부부의 연대감을 깊게 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형성한다.
너그러움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연구에 의하면 행복한 부부들의 긍정적 언행과 부정적 언행의 비율은 5대 1이다. 상대방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감사나 칭찬의 말을 하는 빈도가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경우 보다 5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불행한 부부들은 부정적 언행 한번에 긍정적 언행은 한번이 채 못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시인 매들린 브리지스는 이런 시를 썼다. “사랑을 주면 당신 삶에 사랑이 넘쳐흐르고 … 당신이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면 / 최상의 것이 당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인생거울’ 중에서)
‘세상’ 대신 ‘남편/아내’를 넣으면 바로 피부에 와 닿는다. 오는 14일 밸런타인스데이를 앞두고 초컬릿이나 꽃다발을 사기 전에 먼저 물어보자. 나는 남편/아내에게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인가, 얼마나 자주 사랑을 표현하는가, 잘못이나 실수를 얼마나 잘 용서하는가. - 백년해로의 비결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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