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병원 환자 대기실,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그 노인을 데리고 온 듯한 딸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노인이 추울새라 연신 노인의 옷깃을 여며 주고 있다. 심청이 같이 보인다. 다음 순간 나는, 내 옆자리의 딸 민아에게 눈길을 돌린다. 민아가 내 눈길의 의미를 알아 차렸는지 빙그레 웃는다.
2년 전 7월, 디스크 수술 이후,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수술의의 지시로, 병원 나들이 때마다 딸애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다, 어떤 달에는 제 에미의 병원 픽업까지, 딸애의 고생과 시간 빼앗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딸애의 입에서 농담조로 흘러 나오는 “LA나, 타주로 이사를 가야지” 라는 말에, 나는 “흥, 늙고 병든 에미 애비 팽개치고 도망 가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지” 라고 웃어 넘긴다.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민아는 이제 너무 커 버렸다. 벌써 사위 볼 나이다. 그런데 시집을 가서도 우리와는 5분 거리를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는 민아에게, 난 “사랑해 민아 !” 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결혼하면 꼭 첫딸을 낳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첫 딸은 살림 밑천이다’ 라는 속설을 믿어서가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내세운다면, 노총각 시절이던 어느 날 퇴근길 버스 안에서 내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새색시 품에 안긴, 갓 첫돌을 지난듯 한 여자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방긋방긋 웃음 짓던 그 웃음과, 솜틀 같이 보드러운 손길로 내 얼굴을 만지던 그 보드러운 감촉이 나를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 모른다.
30살에 늦장가를 든 난 바램대로 첫 딸 민아를 얻었다. 민아는 커 갈수록 제 에미의 외모를 닮아 갔고, 소질은 이 애비의 연극끼를 닮아 갔다. 그래서 5살 때부터 이 애비를 따라 6번의 일본 순회공연 중 5번이나 참여 했고, 초ㆍ중ㆍ고등학교 때도 많은 연극에 출연 했었다. 미국 이민 이후에는 U.C버클리의 연극영화과를 나와, 이 애비를 도와 어린이극 ‘콩쥐 팥쥐’의 연출을 맡는 한편, 성인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아의 연기생활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있다면 그건 6살 때 박상호 감독의 영화 ‘비무장지대’에 출연한 일일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연극계의 선배이자, 극단 ‘신협’의 배우였던 박감독이 배우생활을 접고,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한 첫 작품인 ‘비무장지대’의 주역인 꼬마배우를 찾기 위해 나의 ‘새들’ 연기실로 찾아 왔었다.
그리고는 ‘새들’ 단원들의 사진이 꽂힌 앨범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 때 “아빠” 하고 나를 부르며 민아가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책상머리에 기대서서, 나에게 재롱을 부리고 있는 민아를 곁눈으로 지켜보던 박감독이 보고 있던 앨범 책장을 탁 덮고는, “주 단장, 나 주형의 딸을 데리고 가겠소!” 라고 회심의 소리를 외쳤다.
그리하여 강원도 철원 근처의 휴전선 언저리에서 지뢰밭을 헤치며 목숨을 건 4개월 간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민아는, 그 때까지 신성일이 최다로 찍은 100씬 보다 20씬이나 더 많은 120씬을 소화해 내었고, 이 고되고 위험한 촬영으로 민아의 온 몸은 찍히고 할퀴고, 상처 투성이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오늘 날 유현목 감독의 ‘잉여인간’ 과 함께, 한국 영화사에서 화제작으로 꼽히고 있는 이 ‘비무장지대’는 그 해 아시아 영화제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시상식은 텔레비전으로 전국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시민회관 대극장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객석 앞 좌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온 유명 영화배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자리한 민아 에미와 나는 설레이는 가슴과 눈길로 무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시상대에 선 민아의 연보라 색 한복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그런데 시상식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도중, 관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 께서 꼬마 배우 주민아 양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무대에 불려나온 민아가 수천 관중의 우뢰 같은 박수 속에, 청와대에서 가족들과 함께 TV 중계를 보면서 보낸 육여사의 꽃다발을 추켜 올리며 활짝 웃음 짓던 민아의 모습은 그날 밤 시상식의 ‘하이라이트’ 였다.
그 해 민아는 아시아 영화제와 조선일보 주최의 청룡상, 그리고 영화 관계 기자들이 뽑은 아역상을 받음으로서, 앞으로 촉망 받을 아역배우로 지목 받기도 했지만, 영상 체질이 아닌 무대체질의 연기자 였던 민아는 다른 영화 스크린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48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 이곳 미국 땅에서 신앙에 깊이 뿌리 내린 가운데, 남다른 추억 거리를 지니고 살고 있는 민아는 달이 어두운 밤을 밝혀 주듯이, 나와 제 에미의 부족함을 메꿔 주는 달 같은 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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