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는 연중 가장 많이 모이고 가장 많이 먹는 계절이다. 대화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음식냄새 -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그런 만큼 사람소리, 음식냄새 없는 집안은 적막감이 더 더욱 깊어지는 것이 연말연시이기도 하다.
지인 중에 오빠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운 분이 있다. 70대인 그분의 오빠가 최근 상처해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오빠의 건강도 걱정이지만 무엇보다 큰 걱정은 식사”라고 그분은 말한다.
“(오빠가)할 줄 아는 것이라곤 라면 끓이는 것뿐인데, 매일 라면만 먹을 수도 없고 매일 외식을 할 수도 없고 …”
중년이상 이민1세 남성들이 평생 부엌에서 보낸 시간은 몇 시간이나 될까? 부엌은 ‘여성의 공간’으로만 알고 살아온 대부분 1세 남성들이 배우자를 잃고 나면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가 ‘먹는 일’이다. 끼니때만 되면 ‘자동적으로’ 차려지던 밥상이 아내 떠나면서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상실의 아픔보다 먹는 문제가 먼저 발등의 불로 들이 닥친다.
‘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이 근년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고령화 시대의 선두주자인 일본에서 1980년대에 출간되었던 책이다. 저자는 여성과 고령자 문제 전문가 시하시 게이죠. 1982년 엄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83세의 아버지가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맹훈련 시킨 경험담을 책으로 썼다.
게이죠의 아버지는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어느 누구도 아버지를 모실 형편이 안 된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혼자 살겠다’고 선언하고, 그런 아버지에게 셋째 딸인 저자는 ‘악바리 조교’를 자처한다.
평생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혹독한 훈련을 견디다 못해 딸과 싸움까지 한다. 하지만 그렇게 1년 여 아버지는 장보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며 홀로 서기에 성공한다.
여성은 평균 55세가 되면 ‘요리의 달인’이 된다고 한다. 영국의 한 식품회사가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이다. 50대 중반쯤 되면 여성들은 어떤 재료를 내놓아도 뚝딱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한인주부들도 여기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그 실력을 남편에게 전수하는 문제를 여성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몬테리 팍에 사는 주부 박희경(72)씨는 여고동창 부부들과 ‘요리 강습회’를 시작한다. 아내들이 아니라 남편들이 돌아가면서 요리시범을 보이는 일종의 ‘발표회’이다.
그가 이런 구상을 하게 된 것은 3학년짜리 손자가 혼자 아침을 척척 해먹는 것을 보면서였다. 손자가 요리 클래스에서 식탁매너부터 오븐 냉장고 도마 칼 사용법, 시장 보기, 아침 해먹기 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할아버지’ 남편들에게 꼭 필요한 클래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동창 남편들은 70대 중반인데 심한 경우 물 한잔도 직접 가져다 마셔본 적이 없다. 얼마 전 부부모임에서 요리 이야기가 나오자 남편들이 스스로 ‘요리 실력’ 점수를 매겼다.
최하점은 ‘0점’. 부엌에 들어가는 법이 없다. 아내가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고 외출하면 랩으로 씌운 건 먹지만 플래스틱 뚜껑이 덮여 있으면 그걸 열고 먹을 줄을 모른다. 집안에 젓가락이 어디 있는지 물컵이 어디 있는 지 전혀 모른다.
‘35~40점’은 박 씨의 남편. 아침을 해먹을 줄 안다. 아내가 아침 일찍 골프 치러 가는 날이면 계란 후라이를 하고 햄과 빵을 구워 아침식사를 스스로 준비한다.
최고점은 ‘75점’. 아내가 너무 바빠서 남편이 장을 보고 반찬도 만든다. 미역국도 끓이고 양념된 불고기를 사다 볶을 줄도 안다. 하지만 너무 맛이 없어서 ‘75점’ 이상은 언감생심. 그래도 그중 전문가인 만큼 지난 모임에서 ‘나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발표로 ‘강습회’의 테이프를 끊었다.
‘요리 강습회’로 아내들은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요리’를 가르쳐 줄 구실이 생겼다. 남편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이유를 박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도 손 좀 놓아야지요. 여자들이 나이 들면 아픈 데가 많아요. 몇십년 남편 수발들었으면 이제 남편 수발도 받아봐야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을 위해서이지요.”
‘만약’은 아내가 남편보다 먼저 갈 경우. 60대 이상이면 누가 언제 갈지 모르는 게 현실이다. 아내들은 “내 남편은 몇 점?”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되도록 수발 들어주는 게 최선이 아니다. 최소한 밥은 끓여 먹을 수 있도록 남편을 준비시킬 의무가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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