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15일이면 미 전국의 우체국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세금보고 마지막 날인 이날 세금보고 서류를 우송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는 것이 ‘4월15일 미국’의 풍경이다. 그 어느 4월15일의 일이다. 허핑턴 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가 얼마 전 칼럼에서 친구의 선행 이야기를 소개했다.
“친구가 우체국에 가니 단 한 대뿐인 우표판매 기계 앞에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필요한 양만큼만 우표를 사는 대신 20달러어치를 샀다. 그리고는 뒤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우표를 모두 나눠주었다.
짜증 가득하던 우체국 안은 갑자기 환희의 장이 되었다. 공짜로 우표를 받은 사람들은 받아서 기쁘고, 우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긴 줄이 순식간에 짧아져서 기뻐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며 흥분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
20달러를 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까. 좀 비싼 점심 한끼 먹었다면 혼자 기분 좋고 말았을 돈으로 적어도 20여명이 기분 좋은 경험을 했으니 효용의 극대화이다. 게다가 그 흔치 않은 경험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며 흐뭇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혹시라도 인간에 대한 불신을 버린 사람이 있다면 20달러의 효과는 거의 측정 불가능하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은 남을 돕고 베푸는 데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사나운 맹수들이 우글거리던 원시세계에서 몸집 작은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성향이 유전자에 각인돼 지금도, 특히 위급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돕고 협동하게 된다고 행동과학자들은 설명한다.
최근 학술지 네이처에도 비슷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걸 보면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도움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을수록 선행을 실천하는 비율은 떨어진다는 결론이다. 본능적으로 내어주려던 손이 머릿속의 계산기가 작동되면 움츠러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각박한 것은 ‘계산기’에 너무 의존해 살기 때문이다. ‘계산기’에는 감동이 없다.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의 의과대학은 직업학교 수준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연구시스템을 갖춘 신개념 의과대학으로 태동한 것이 존스 합킨스 의과대학이었다. 1893년 학교 설립에 4명의 교수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1900년 전후 이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빅 4’로 불렸다. 그중 한명이 하워드 켈리 박사였다. 외과의이자 산부인과 의사, 의과대학 교수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우유 한잔’으로 더 유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방문판매를 하면서 학비를 벌던 고학생이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팠다. 주머니에는 달랑 동전 한 닢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하려고 근처 어느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문을 연 사람이 하필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다 보니 용기가 나지 않은 그는 그냥 물 한잔을 부탁했다. 하지만 척 봐도 배고파 보이는 청년에게 여성은 물 대신 우유를 한잔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청년은 진심으로 감사하게 마시고 힘을 얻었다.
몇 년 후 그 여성이 병에 걸려 대도시의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진료를 맡은 켈리 박사는 환자의 고향 지명을 듣는 순간 그 여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성심을 다 한 치료 끝에 여성은 건강을 회복했고 퇴원 직전 병원비 청구서를 받았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아마 평생을 두고 갚아야겠지” 걱정하던 여성의 눈에 청구서 하단에 쓰인 이상한 구절이 보였다. “우유 한잔으로 전액 납부”
감동적인 이 이야기는 사실 좀 각색이 되었다. 켈리는 고학생이 아니라 부잣집 아들이었고, 방문판매가 아니라 산행에 나섰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하지만 산골의 가난한 여성이 우유를 건네 준 것은 사실이고 ‘우유 한잔’으로 병원비를 대체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한다.
기대되지 않은 선행은 감동을 낳고 감동은 종종 다른 선행으로 이어진다. 감동 바이러스가 만드는 선행의 릴레이이다. ‘우유 한잔’은 때로 수천수만 배의 가치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기적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은 살아볼 만하다. 계산기만 두드리다가는 절대 맛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2012년 시간의 들판에 선행의 씨앗을 얼마나 뿌렸는지, 그래서 추수할 게 좀 있는지 돌아봐야겠다. 간절히 도움 필요한 사람에게 ‘우표 한장’ ‘우유 한잔’ 내어주었다면 그 삶은 복되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