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끔 즐겨보는 프로그램 가운데 <러브인 아시아>라는 다큐멘타리가 있다.주로 월남이나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서 온 젊은 여자들이 한국의 농촌 남성들과 결혼해서 잘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자들이라 그런지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서 남편들과 시집 식구들과 함께 알콩달콩 사는 얘기들이다.
그들은 한국에 시집와서 몇년이 지나 자신들의 고향을 방문하고 그동안 그리웠던 가족들과 상봉하고 며칠동안 함께 회포를 풀어내는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스토리가 대부분인데, 보통 한국의 사위들이 처가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고 함께 여행도 하면서 정을 나누는 얘기들이라 그 프로그램을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오고 때로는 그들의 이별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한다.
그 이야기들은 나를 문득 사오십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이 지독히 가난하던 때,아니 전국민 모두가 가난으로 찌들어서 너나 없이 고생을 하던 때를 상기하게 되고 지금도 가슴 한쪽을 아리게 만든다.
내가 그 시절 가난을 더 서럽게 느꼈던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해 까지 나는 유복한 집 막내 딸로 부족한 것 없이 살다가 갑자기 사기꾼을 만나 친정이 하루 아침에 망하고 나도 가난한 예술가를 만나 상상도 못한 가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들은 미아리 어느 산꼭대기 까지 밀려가서 그야말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나는 직업을 찾아 미군부대까지 가게 되었다.
마침 영어를 조금 할줄 알았던 덕에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었고 우리 식구들은 밥 걱정을 덜게 되었고 나중에는 미군 장교들 덕에 텔레비죤까지 구입하게 되었다.그 시절 잘사는 사람들조차 텔레비죤을 갖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내 아이들과 가족들은 손벽을 쳐가며 좋아했고 동네방네 자랑을 한것은 물론이다.
그 시절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없었지만 어쩌다 권투 시합 같은 것이 나오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뫃여 그것을 시청하곤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큰 애는 동네 아이들한테 그 댓가로 돈 십원씩을 받고 으시대곤 했다고 한다.지금 생각해 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득했던 날의 이야기다.
가끔 내가 직장에서 쉬는 날이면 달콤한 씨리얼이나 오렌지 같은 과일이나 초콜렛을 가져오면 내 두 아이들은 신이나서 법석을 떨며 좋아했다. 그 시절 우리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 미국 음식뿐 아니라 씨얼스로벅에서 나오는 옷이나 장신구며 옷감들은 시중에 나가면 최고의 인기상품이었고 없어서 못팔았다. 피엑스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양키 물건을 파는 아줌마들이 호시절을 누리던 때였다.
미국에 정작 와서 보니 씨얼스로벅보다 더 고급 물건을 파는 백화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그때 정신적으로 지탱해 주던 것은 물질이 아니라 문학이었고 시를 쓰는 시간이었다.
내가 비록 미국사람들 때문에 먹고는 살지만 나를 붙잡아 주던 것은 나는 가난하지만 시인이라는 자부심과 대학을 나온 인텔리라는 점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긍심이다. 이자긍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 내가 나를 좋아하고 나를 행복하다고 믿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다.
지금 내 노후의 생활이 활력이 있고 긍정적이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할일이 있고 건강이 있고 적당하게 쓸 돈이 있고 또 적당하게 놀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늙어갈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떤 교수가 말했다.
거기다 한가지 더 보탠다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의 지수가 높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때 호소하고 떼를 쓰고 감사할수 있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기댈수 있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나의 꿈은 문학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국에 오는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의 풍요에 이미 맛을 본 나는 미국에 오는 것이야 말로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울수 있고 내가 앞으로 잘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당시 젊고 가난한 이혼녀가 꿀수 있는 당연한 꿈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남편을 만났다. 내가 남편을 택한 이유는 그가 대학 출신이었고 성실하고 문학과 클라식 음악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시골 출신의 남편이 코리아라는 작은 나라에 와서 그것도 이혼녀와 결혼한다는 생각은 아예 그의 삶의 각본에는 없었던 일이었고 꿈조차 꿀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 둘을 이어 주었고 처음엔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그의 부모들도 나중에는 나와 내 두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주었다.
어느 훗날 시어머니와 나는 정원에서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지난날을 이야기 하게 되었고,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난후 시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면서 내가 그토록 힘든 시절을 겪은줄은 정말 몰랐다고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 하셨다.
결국 나는 내 젊은 날의 꿈을 다 이룬것일까. 내 두 아들들을 모두 미국에 데려 와서 그들도 이젠 행복한 가정들을 이루었고, 여기서 난 두 남매들도 각자 다 잘 살고 있으니 그런대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다. 아직 내 남편도 옆에 건재하고 나는 늦게나마 내가 쓰고 싶은 글도 쓰고 또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고 있으니 말하자면 한세상 잘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햇볕이 등뒤로 따뜻하게 느껴지고 붉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며 또 한해가 가고 있구나!를 느끼지만 쓸쓸함 보다는 잔잔한 행복이 밀려오는 그런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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