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 바닥 수리와 페인트를 했다. 정말 오래전부터 해야 했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더 이상 미루기에는 너무 창피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집 바닥 수리와 페인트를 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모든 가구들과 물건들을 이사 가는 양 정리를 해놓아야 했다. 아니, 사실 이사가는 것 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집 안에서 싸고 이리 저리 옮겼다 다시 풀어 제 자리에 찾아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안 전체는 한동안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들쑤셔져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지금 대학교 졸업학년에 있는 둘째 아이의 옛 공책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혹시 버려도 되는지 그대로 보관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 내용을 들여다 보았는데 어렸을 때 한글학교에 다니면서 사용했던 것이었다. 한글학교에 마지막으로 다닌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때 였으니 아마 1-2학년때 쓰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보아 나가다 어느 한 페이지에 이르러 박장대소를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마 선생님이 불러 준 것을 받아 적은 것 같은데 “우리나라를 세운 시조-당근”이라고 쓰여져 있는게 아닌가?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 단군이 아니라 당근이었다. 선생님은 단군이라 불러 주셨을텐데 우리 아이는 그것이 평소에 들어왔던 당근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나라를 세운다”는 것과 “시조”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의미 파악이 되었다면 아마 당근이라고 쓰지는 않았을텐데 뜻을 잘 이해 못한 채로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한 게 아닌가 싶다.
둘째는 가끔 자신의 어렸을 때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입을 즐겨 본다. 어렸을 때 떨던 재롱이며 형과 뛰어 놀던 모습은 아무리 많이 보아도 싫증이 안날 듯 싶다. 그리고 어렸을 때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만 사용하던 모습이 신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자신이 예전에 그렇게 한국말을 잘 했나 하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 놀라움에는 그동안 많이 퇴보한 자신의 한국말 수준에 대한 아쉬움이 내포해 있을 것이다.
두 애들이 아주 어렸을 때 물론 집에서 한국말을 사용했고 토요일에는 한글학교에도 꾸준히 다녔다. 한글 책도 읽었고 한국말 웅변 대회에도 참가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애들이 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쓰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영어를 쓰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애들이 운동에 관심을 점차 많이 갖게 되자 토요일 한글학교 수업시간과 운동 스케쥴이 상충되기 시작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한글학교보다 운동이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애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 때문에 한글학교에 가서 한글공부를 못하게 된다면 다른 때 시간을 내서라도 한글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어휘는 늘어나는 반면 한국말은 사용하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 들면서 결국 퇴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들이 한국어의 중요성을 느낀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인 것 같다.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학교공부나 직장, 사회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좀 더 자신만의 고유문화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된 것 같다. 물론 대학에서도 고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면서도 말이다. 대학 때 한국문화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좀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미국서 자라는 우리 자녀들 대부분이 겪는 것 같다.
대학을 마친 후 일을 몇 년 먼저 해보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큰 애나 대학 졸업 후 공부를 바로 더 계속 하겠다는 둘째 애 모두 언젠가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좀 더 배우고 잘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견이 없다.
때로는 영어 자막이 나오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나와 같이 보면서 좀 더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한국말이 아직도 더 편하게 느끼는 아빠인 나 보다 요즘 유행하는 한국 가수나 노래에 대해 애들이 훨씬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그러한 갈망을 갖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부모들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게 두 애들을 열심히 키웠고 나름대로 바로 서도록 인도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 아쉬운 부분으로 마음 속 깊게 자리잡고 있는 부분이 바로 한국어 공부를 좀 더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해도 어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애들과 조금 더 불편한 순간들을 맞닥뜨리더라도 설득해 보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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