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이 산등성이 언덕받이와 돌담 벼랑에 노란 개나리를 피운다. 또한 소슬한 가을 바람이 들녘길에 코스모스 꽃을 피운다. 그리고 늦가을 찬서리가 울타리 가 감나무의 감을 붉게 물 들인다.
그런데 우리는 곱게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과 붉게 익은 감의 그 다디단 단맛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노란 개나리 꽃을 피우게 한 봄볕과 코스모스를 피운 가을 바람이나, 감을 익게 한 서리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는게 현실인 것 같다. 그뿐인가, 우리는 우리의 밤길을 비춰주는 가로등 불빛의 고마움 또한 잊고 산다.
오늘 나는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 드는 길목에 서서 나를 문인으로 또 연극인으로 그리고 제법 춤도 출 줄 아는 춤꾼이 되게 하는데 영향력을 끼쳤던 봄볕 같은, 가을 바람 같은 또 서리 같은 그리고 가로등 불빛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고마운 분들의 얼굴을 새삼 떠올려 본다.
멀게는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있는, 일제시대인 내 초등학교 2, 3학년 때의 담임 선생이었던 김윤권 선생님! 서울의 어느 부잣집 아들이 었던 그 분이 폐병 요양을 겸해 조그마 한 섬마을 학교인 우리 학교로 유일한 한국인 선생님으로 부임하셔서 학예회 때 나에게 연극의 주인공을 맡게 해 주셨던 선생님.
그런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라는 말이 있듯이, 그래서인지 오늘날 내가 연극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뿐 아니다. 나는 김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판서를 보면서 그 멋진 글 솜씨에 매료 되어 나도 후일에 저렇게 멋진 글씨를 쓸 수 있다면 했던 부러움이 반쯤은 이루어진 듯, 오늘날 남들이 내 글솜씨를 보면서 ‘제법 달필(?) 이다’ 라는 칭찬(?)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서 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내가 3학년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 왔을 때 김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문이 내 귀에 들려 준 말은 김선생의 병이 나빠져 마산에 있는 폐결핵 요양소에 가셨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중학시절, 나는 시인 김춘수 선생님을 국어선생님으로 만났다. 선생님 또한 내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고마운 분으로, 내 비망록 한 칸에 적혀져 있는 분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해방 이듬해인 내가 중학교 4학년 때, 내가 출연한 학교 연극제에서 ‘조국’(유치진 극본)의 연출을 맡았을 뿐 아니라, 내가 바다와 섬이 맞닿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5월의 뭉개구름을 바라보면서 지은 ‘구름’ 을 우리 학교 교지인 ‘미륵산’에 실어 주시고는 날더러 “주 군은 앞으로 시인이 될 소질이 엿보여!” 라고 하시던 칭찬이, 내가 후일에 문학의 길로 발을 들여 놓게 된 요인이 된 게 틀림 없어 보인다.
내 중학시절 김춘수 선생님 말고도 나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또 한분의 가로등 같은 선생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일제 때 도쿄대학 교지인 ‘아까몬’(붉은문,동경대학의 상징)이란 잡지에 희곡 ‘칸무리’(우리 말로 ‘금관’)을 실을 만큼 뛰어난 극작가인 5학년 때의 국어 선생이었던 박재성 선생님이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자습시간을 주고는 창가에 기대 서서 한참을 멀리 바라보시다가 그의 책상에 돌아가서 인근 여자중학교의 연극제에 상연할 ‘봄의 교향곡’ 이란 그 학교의 음악선생이었던 윤이상 선생이 작곡을 맡기로 한 뮤지칼을 쓰시던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그때 박선생님의 그 모습이 후일 나로 하여금 극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한 동기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선생님도 내 초등학교 시절의 김윤권 선생님처럼 내가 5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등교 했을 때 박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박선생님이 일본에 남겨 두고온 일본인 부인을 데리고 밀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오시다가 풍랑을 맞아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다.
동경 유학생 김유진과 윤심덕이, 관부 연락선 선상에서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라는 ‘사의 찬미’를 부르며 현해탄에 몸을 날린 사건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동반 자살인데 비해, 박선생님 내외분의 죽음은 높은 풍랑이 그들을 삼킨 죽음이란 점에서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현해탄에서 생을 마감한 박선생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나는 6.25 피난시절, 내 고향 무대에서 선생의 극본 ‘산비둘기’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공연사진 앨범을 새삼 들춰보면서 그 분이 좀더 오래 살아 계셨더라면 유치진 선생님과 어깨를 겨눌만한 유명 극작가로써, 내 고향을 빛낸 문인 중의 또 한사람으로 기록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슴에 담아 보는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