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인간발달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프로젝트는 자신의 발달과정을 돌아보고(과거) 앞으로 자신의 발달과정(미래)을 설계해보고, 각 단계를 학설을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논문을 쓰는 것이다. 시험보다 비중이 50%나 더 많은 150점이 부여되는 이 과제를 받으면 모두 한숨을 쉬고 엄살을 부리지만 학기말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프로젝트가 가장 의미 깊었다고 고마워한다.
매학기, 반 이상의 학생들은 과제를 수정해서 다시 제출해야한다. 출생에서 죽음까지 자신의 생애를 단계별로 온전히 짚어보라고 강조하건만, 대부분 결혼해서 아이 낳고 은퇴하는 것에서 필름이 끊긴다. 이번 학기에도 아이들 대학 보내고 50대쯤에 은퇴해서 세계여행을 하는 것에서 필름이 끊기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인생의 마지막 장을 그렇게 간단, 명쾌하게 처리한다. 공주와 왕자가 나오는 옛날이야기의 끝처럼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그 후에 무슨 문제 될 것이 있느냐는 식이다.
하긴,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그 후에는 모든 게 술술 풀리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는 막연한 꿈을 꾼다. 이것은 계속 이어져서, 좋은 직장만 잡으면, 좋은 배우자만 만나면, 결혼해서 내 집을 장만하면, 자식들이 공부 잘 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자식들이 결혼 잘 하면, 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제 겨우 대학 2학년생들에게 자신의 장년과 노년을 생각해보라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시기를 빼면 학점을 안 주고 수정하라고 돌려주는 것이다. 논문을 돌려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모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며 혹은 그와 비슷한 장년과 노년, 혹은 그와 정 반대의 노후를 맞고 싶다고 쓴다.
에릭슨의 인성발달 이론에 의하면 인성은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 발달된다. 중년기 이전까지의 단계가 자아정립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면 제 7단계인 중년기는 정립된 자아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계획이나 목표를 성취하는데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서까지도 사랑을 가지고 돌보려는 성숙한 태도를 의미한다
.
에릭슨은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자기희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황금률을 재해석하면서 그렇지 못하면 침체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시기의 악덕목인 무관심은 의지의 상실과 싫증냄에서 나타난다. 인생 중반에 이른 사람들은 이제까지 많은 것을 경험해 왔는데, 앞으로도 똑같은 일만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노년기는 인성발달의 마지막 단계로 인간의 모든 갈등이 조화롭게 통일되며 성숙한 경지에 도달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자신의 삶 전체를 받아들이고 세대와 세대 간의 계속성에 참여하는 일이다. 전 단계의 생산성이 타자에 대한 돌봄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자아통합은 이전 세대와 동지의식을 갖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위해 시공을 달리해서 몸 바쳐 일한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합과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혐오감이나 절망감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향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후회하거나 염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고, 타인을 향해서는 아무리 값진 일을 해낸 인물이라도 경멸하려 든다. 이것은 자신의 후회스러운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장년과 노년기를 내다보지 못하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계로 넘겨버리는 학생들에게 김준태 시인의 시, ‘참깨를 털며’를 낭송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 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한 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중략)……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시 속의 노년의 할머니가 청년의 손자와 함께 참깨를 터는 느긋하고 정겨운 모습과 “모가지까지 털”어서는 안 된다는 인생의 귀한 지혜를 온 몸으로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에릭슨의 장년과 노년에 관한 이론이 좀 더 쉽게 이해될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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