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와 함께 CNBC를 보니까 1983년 창립 당시에는 Price Club이라고 불리다 1997년부터는 COSTCO라고 개명된 회원제 창고 상품 구매점 비즈니스가 길게 소개되었다. 기존의 식품점이나 백화점처럼 진열대에 상품을 아기자기하게 배열하여 호객을 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대형 창고 안에 여기저기 통로들 사이에 물건을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방식이라 값이 싸다는 평판을 이룩하여 성공한 기업이다. 물건 값이 저렴한 데는 다량 구입에 큰 사이즈의 판매 방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2011년도 총 수입이 880억불이고 순수입만도 14억불로 미국의 최대 회원제 (2009년도에 5,500만명) 박리다매 업체가 되었고 캐나다, 멕시코, 한국 등 7개국에 진출되어 포춘 잡지의 세계 500대 기업 중 24번째 서열이다.
그 방송 내용 중 특히 우리의 눈을 끈 것은 COSTCO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다. 퇴임하는 CEO의 말을 빌려 간단한 메뉴 중 특히 순 소고기로 만든 핫도그는 1불50센트에 소프트 드링크까지 끼워주는데 그 가격이 약 3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데는 한번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벨츠빌에 위치한 COSTCO에 갔을 때 핫도그를 먹어보았다. 토마토 캐첩과 겨자 그리고 양파 잘게 썰어 넣은 것 등을 섞어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3달러짜리 데이트를 한 셈이다. 엊그제도 휘발유도 넣을 겸해서 3달러짜리 데이트를 하자고 COSTCO에 갔다. 아내가 핫도그는 먹어보았으니 다른 것을 먹어보자고 해서 칠면조 고기에 치즈를 넣은 빵 종류(3.99), 닭고기를 넣은 빵(2.99) 그리고 혹시 모자랄까봐 피자 한 조각(1.99)을 시켰으니까 20불을 주고 10불 40센트를 거슬러 받았다. 양이 어찌 많은지 다 먹지를 못하고 집으로 가져와서 야구게임을 즐기는 중간중간에 먹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52년 전 연애하던 시절이 회상되었다.
1960년 12월 당시 장면 정부가 엄민영 씨를 단장으로 하는 학생문화사절단을 일본에 보낸 것이 우리가 만난 인연이 되었다. 두어 주 미만의 여행 중 장난삼아서 나는 세 아이를 가진 29세의 기혼자라고 자칭하여 김백봉 무용단의 미녀 대학생들과 기타 단원들이 나를 ‘남 선생님’ 또는 ‘남 기자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곤 했었다. 당시 이대 음대 3년생이던 김경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진 찍은 것을 찾겠다고 동아일보 외신부로 전화를 했을 때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미국 대사관 옆에 있던 다방으로 나오라 했다. 이야기 끝에 뜬금 없이 나와 결혼해 달라고 뚱딴지 같은 수작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부인은 어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법적인 도덕적인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아이 셋이란 것은 거짓말이고 아이 하나만 있는데 그 아이만 잘 길러주면 될 것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으니 기가 막혔을 쯤하다. 생각해보겠다면서 날 살려달라고 집으로 달려갔겠지만 전화가 한 시간에도 몇 차례씩 걸려와 미혼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 등본을 가져오겠다 또는 동료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면서 치근대는 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 경우가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전화라고는 안방에 딱 한 대 있던 시절이라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입장이 곤란해서 만나주기로 약속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난감한 처지였다. 주머니에는 달랑 집에 돌아갈 버스 차비 밖에 없었으니까. 마침 편집국의 급사 하나가 내 나이 또래였는데 그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을지극장에서 본 영화가 이태리 아니면 불란서 영화로 소매치기에 대한 영화라 아이들이 있는 기혼자라고 거짓말 했던 전과와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되었다. 극장에서 나와 저녁을 먹자면서 부근의 식당들은 모두 지나치고 왜 하필이면 광화문 동아일보사 부근에 있는 복취루로 가자고 했는가 의아했다는 김경희는 나중에서야 그곳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긋고 먹고는 월급 때 갚는 외상집임을 발견하게 된다.
매일같이 만나다 보니 김경희도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부모님 속깨나 썩혔을 것이다. 결혼하자고 굳게 약속한 것을 떼어놓으려고 부모님은 정경화, 정명화와 함께 줄리아드 음대를 가라고 촉구하셨지만 미스터 남하고 같이 보내주기 전에는 안 간다고 거절했다니까 눈꺼풀이 씌웠어도 단단히 그리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월세 단칸방으로는 시집을 올 수 없대서 수유리 7평 반짜리 연립주택을 계약했다. 당시에 동아일보 등 언론기관들마저 수세식 변소가 없던 시절 처갓집에는 수세식 변호가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던 집안의 장녀가 전등도 없는 뒷간을 가진 자그만 방 두 개짜리 칼집 같은 데로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니까 부모님들의 심정이 어쨌을까는 딸들을 길러본 다음에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처갓집에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여러 번 실패하면서도 풀브라이트 장학생 선발에 응했을 것이다. 1964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은 생활비로 한 달에 205불씩 받았는데 그것이 기자 월급의 다섯 배가 넘었던 액수라고 기억된다. 1969년부터의 학교 생활은 내 실력이 없었던 탓인가 혹은 못된 인간들의 불공정한 처사 탓인지 영구직을 못 받아 1985년에 변호사로 전직하게 되었으니 내내 아내를 고생시킨 셈이다. 그래도 아내는 3불짜리 데이트로 만족하는 사람이니 장가 잘 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