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 에세이
▶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가을의 꽃, 국화가 한창이다. 국화 철이 되면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가 떠오르고 한 여름 국화 옆에서 잠 못 이루며 애태우던 반세기 너머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해 여름 나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5학년 열한 살 소년이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토록 울었다는 미당의 소쩍새처럼 울며 지새웠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돌아가 쉬고 싶은 고향처럼 그리워진다.
그 날은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방학 날이었다. 방학과제물을 다 나눠준 담임선생님이 손으로 이마를 탁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중요한 방학 숙제를 깜빡 했네. 이 숙제는 세 명이 맡으면 되는데… 누가 맡아줄까?”
선생님이 창가에 놓인 세 개의 화분을 가리켰다. 봄부터 급우들이 일주일씩 당번을 맡아 정성껏 가꿔온 화분들이다. 한 달이나 되는 방학 동안 텅 빈 교실에 놓아 둘 수는 없었다. 이름 모를 큰 화분은 덩치 큰 석환에게 맡겨졌고 코스모스 화분은 반장인 제종에게 돌아갔다.
“국화 화분은 학습부장 시엽이가 맡지? 반을 대표해서 맡는 거니까 잘 가꿔야 해.”
국화 화분은 햇빛이 잘 드는 장독대 위에 모셔졌다. 뒷산에서 긁어온 부식토와 쌀뜨물을 매일 먹인 탓인지 국화는 새 잎을 틔우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국화가 제일 몰라보게 컸네”하는 선생님의 칭찬이 귓가에 쟁쟁히 들려왔다. 방학이 열흘이나 훌쩍 지나갔다. 국화 옆에서 나는 개학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개학날 탐스럽게 키운 국화 화분을 선생님과 온 급우들 앞에서 뽐내보려던 나의 꿈이 깨져버렸다. 국화잎이 밑에서부터 하나 둘씩 잘려나가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 발생한 탓이다. 선생님의 노한 얼굴이 떠오르고 급우들이 놀려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며 나를 울렸다. “네 국화는 여름을 탔냐? 껑충 키만 컸네.” “국화가 벌써 낙엽이 졌냐?”
새 잎을 틔었지만 국화는 꽁지 빠진 새처럼 볼썽사나워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동생의 장난 같았다. 그러나 온 종일 동생을 감시한 날에도 국화는 잎을 잃었다. 동생은 혐의를 벗었고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뜻밖에 범인(?)이 범행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 장독대가 내려다보이는 다락방에서 수박을 먹으며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다. 햇빛이 마당을 빠져나가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놈은 능숙하게 화분을 기어 올라가더니 뒷다리를 한껏 곧추세워 국화 잎 하나를 따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저 놈이었구나, 내 방학을 앗아간 놈이!’ 나는 먹던 수박을 놈을 겨냥해 힘껏 내던졌다.
국화는 즉시 장독대에서 유리 창문이 달린 신발장으로 옮겨졌다. 신발장은 햇빛이 잘 들고 1미터쯤 높이에 있어 국화 피난처로는 최적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신발장 문을 열고 해가 지면 닫는 새 일과를 시작했다. 그 뒤 나는 국화가 쥐에게 먹히는 악몽에 종종 시달렸다.
개학 전날, 나는 엄마에게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른 새벽에 살그머니 화분을 갖다 놓을 생각이었다. 개학날이 밝았다. 나는 아침도 거르고 왼손에 방학숙제를 오른손에는 잎이 많이 잘려나간 국화 화분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등교시간 1시간 30분 전에 집을 나섰다.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하는 학교였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향했다. 나의 교실은 3층 건물 2층에 있다. 도둑처럼 사방을 살피며 소리죽여 텅 빈 교실 문을 열었다. 국화 화분을 제자리에 갖다놓고 쫓기듯 내 책상으로 돌아왔다. 멀고 먼 고된 여행에서 돌아온 듯 피로가 몰려왔다. 책상에 엎드려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았다. 급우들이 검게 탄 얼굴로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덩치 큰 화분, 코스모스 화분도 풍성한 잎들을 뽐내며 돌아왔다. 선생님도 검게 탄 얼굴에 웃음을 띠며 들어오셨다.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군. 화분들도 모두 잘 키웠네.”
화분 소리에 나의 가슴은 콩콩 뛰었으나 어느 누구도 화분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몰래 새나왔다. 그 해 가을 내 국화는 세 송이의 노란 국화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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