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미국에서 수십년을 사셨음에도 얼마 전에 영구 귀향을 결심하셨다. 연세가 여든도 중반에 접어든 노인네의 결심치고는 참 대단하다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몇달전 하나뿐인 아들이 미국 방문을 했는데 그때 벌써 두 사람은 그런 얘기가 오갔고, 그때 결심을 굳히게 되었나 보다.
물론 미국에서는 최저의 생활이 보장 되고 건강 보험도 다 무료이니까 노인들이 귀향을 결심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결정인 것이다. 언니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편안함과 보장된 삶보다 아들 옆을 택하신 것이다.
그동안 겉으로는 씩씩하게 사신것 같았지만 정작 늙음에서 오는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언짢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오랜 생활을 타국에서 했다 해도 타향은 타향이고 고향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을 그리워 하고 고국의 소식을 목말라하고, 같은 한국인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하고 가라오케 할때도 고향노래가 나오면 모두다 열창하기를 좋아하나보다.
언니는 처음 미국에 오셨을때는 베이아리아에 사셨지만 지난 십오년을 L.A에서 사셨다. 그곳에서 첫번째 남편과 오십일년만에 다시 만나 오년을 함께 사셨다.
생각해 보면 언니는 누구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사신분이다. 열아홉살때 황해도에서 시집을 가셨다가 해방과 함께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다시 그 첫남편을 만나서 함께 살기까지 장장 오십년의 세월을 흘려 보내신 분이다.
남편과 생이별을 할때 언니는 이미 뱃속에 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고, 그 시대 젊은 생과부가 겪었을 모든 시련을 이겨낸 분이기도 하다.
이차대전과 육이오 전쟁과 모든 한국인이 겪었던 그 참혹한 오십년대, 육십년대 가난을 이겨내고 나이 오십이 다돼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와서 정착할때 까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신 분이기도 하다. 언니는 미국에서 십년을 전자공장에서 일한 댓가로 수백불의 소셜시큐리티를 타신다.
내게 다른 형제들이 두분 더 있지만 형제도 특별히 인연이 깊은 형제가 있다.언니는 그런 분이어서 내게는 언니이며 엄마이며 친구 같이 스스럼 없는 유일한 분이다. 우리 가족이 몽땅 사기를 당하고 가난이 갑자기 닥쳤을때,나는 밥벌이를 향해 미군부대로 갔고 언니는 그때부터 내 두아들을 기르셨다.
머리를 잘라 신을 삼아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언니는 또 내게 그런분이다. 내가 미군 부대에 다니던 어느 무덥던 여름날을 나는 죽을때 까지 잊지 못한다.
하루는 시외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언니가 내 두째 아들애를 업고 얼굴이 벌겋게 돼서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오시는게 아닌가! 그때 언니는 돈이 한푼도 없어서 버스도 못타고 걸어서 몇십리길을 나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걸어오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때 언니가 불쌍해서 흘렸던 뜨거운 눈물을 나는 또 죽을때까지 잊지 못할께다.그후 나는 또 미국에 오면서 우리 두애를 언니에게 맡기고 먼저 떠나왔다.헤어질때 공항에서 서로 얼싸 안고 흘리던 그 눈물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언니는 내게 목의 가시 같은 분이다. 늘 씩씩하게 사시면서도 내게는 늘 슬픔을 주는 분이다. 젊을때 부터 외롭게 사셨으면서도 그 대단한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강한채,아닌채 하며 사신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들은 종종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맞이할때가 있다.이번 언니와의 작별도 그렇다. 언제까지 내 가까운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실줄 알았던 언니가 갑자기 아주 한국으로 떠나신다고 말하셨을때 나는 한대 머리를 얻어 맞은것 같았다.
지난 수십년간을 혼자 일어나고 혼자 주무시고 혼자 밥을 잡수시는 그런 모든 일상의 생활들이 이젠 무의미 하게 느껴지고 지겨워 져서, 또 혹시 무서워져서 아들 옆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어미가 칠순을 바라보는 아들과 따뜻한 밥과 국을 나누어 먹고 함께 손잡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함께 성당에도 나가서 천국을 바라보는 마지막 여행을 함께 할수 있다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삶이 될것 같다.
어제 우리 가족들과 마지막 저녁을 먹고 차를 타시면서 언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언니가 타신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때 까지 우리들은 거기 서 있었고, 언니는 내내 창밖으로 손을 흔드셨다. 내가 언제 한국을 방문해서 언니와 해후하게 될지 우리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애에서 가장 가까웠고,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과 나는 금방 이별을 한 것이다.
내 가슴으로 찬 가을 바람이 지나간다. 이별은 아무리 많이 해도 익숙하지 않다. 더구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은 더욱 그렇다. 죽음은 이별의 종착역이다. 아직은 우리가 살아있고 또 만날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언니의 귀향을 애써 행복한 귀향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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