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한극장 2층 맨 앞줄에 앉아 본 70mm 영화 ‘남태평양’(1958)은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틴이 작사한 주옥같은 노래들이 줄줄이 나오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뮤지컬이다.
2차 대전 중 남태평양의 한 섬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랑과 삶의 소묘인데 프랑스인 농장주 에밀이 부르는 ‘섬 인챈티드 이브닝’과 그를 사랑하는 미 간호장교 넬리가 부르는 ‘어 원더풀 가이’ 등 한 번 듣고도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고운 멜로디의 노래들을 들으면서 영화관람 삼매경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넬리 역은 뮤지컬 배우 미치 게이너가 맡았는데 약간 이국적인 미모의 게이너가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
그 때 스크린에서 본 게이너(사진)를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지난달 30일 세리토스 공연센터서 직접 만났다. 극장은 마치 시니어 시티즌협회가 단체관람을 온 듯 노인 일색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마음은 여전히 틴에이저들일 텐데 추억의 소중함 때문에 왔을 것이다.
‘시퀸 뒤의 내 인생’이라는 제목의 원 우먼 쇼의 주인공 게이너는 7인조 밴드의 음악에 맞춰 해군수병 모자에 복장을 하고 무대에 나섰다. 나도 다른 관객들과 함께 큰 박수로 그녀를 환영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해군 복장은 게이너가 ‘남태평양’에서 쇼를 할 때 입은 모양 그대로다. 게이너는 81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원기왕성하고 아이처럼 신이 났는데 관객을 향해 “아이 러브 유. 우리 함께 즐겨요”라며 쇼를 시작했다. 아직도 그 긴 다리를 그대로 간직한 게이너는 노래와 자신의 개인적 일화를 섞어가며 나이트클럽 스타일의 쇼를 마련했는데 중간 중간 자신의 과거 영화와 TV 쇼(에미상을 6번이나 탔다)를 담은 비디오영상을 무대 뒤 스크린에 비쳐 보여주었다.
게이너는 ‘데어즈 노 비즈니스 라이크 쇼 비즈니스’ ‘심즈 라이크 올드 타임스’ ‘이프 아이 해드 유’ ‘에브리싱 올드 이즈 뉴 어겐’ 그리고 ‘유 아 더 선샤인 오브 마이 라이프’ 및 ‘남태평양’에서 부른 노래들을 메들리로 부르며 위트와 유머로 절인 농담을 재미있게 해 우리들의 박수와 폭소를 받았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예전이나 크게 다를 것 없이 낭랑했다.
중간 중간 적과 흑과 백색으로 옷을 번갈아 갈아입으면서 옆으로 찢어진 드레스 속으로 드러난 날씬한 롱다리를 과시하다가 엉덩이를 흔들면서 애교를 떨었는데 노골적으로 섹스 얘기와 함께 “애스”를 섞어가면서 신나게 자기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옷 좀 잘 입어라”는 따끔한 충고도 한마디 했다.
81세난 할머니가 젖무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노래 부르고 걸쭉한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게이너야말로 진짜 쇼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게이너는 최근 발목을 다쳐 춤을 추지 모했다. 스크린으로 본 그녀의 화려한 춤을 못 봐 아쉬웠다.
게이너는 우리들을 향해 “하우 두 아이 루크”라고 물은 뒤 “나 아직 살아 있다”면서 나이에 관한 농담을 재미있게 했는데 그녀를 보면서 불현듯 ‘야, 저 여자 이젠 살아서는 더 이상 못 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러나 팔순에도 노래하고 농담하면서 쇼의 인생을 사는 게이너는 행복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게이너는 13세 때부터 쇼 인생을 시작해 17세 때 폭스사와 계약을 맺고 출연한 ‘데어즈 노 비즈니스 라이크 쇼 비즈니스’와 ‘레 걸스’ 그리고 ‘에니싱 고즈’ 및 자기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남태평양’ 등과 관련된 일화를 농담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들려 줬다. 마치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는 듯한 아득한 안락감을 느꼈다.
게이너는 또 영화에서 공연한 진 켈리, 마릴린 먼로, 에셀 머맨, 빙 크로스비 및 로사노 브라지 등과의 추억을 말하면서 이젠 모두 이 세상을 떠난 그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추억담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하워드 휴즈와의 관계. 게이너는 방년 18세 때 휴즈를 만났는데 휴즈가 온갖 선물공세를 해가면서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지만 휴즈는 자기 말고도 60명이 넘는 여자들에게 구혼을 한 처지여서 “노, 노”하고 거절했다고 자랑했다.
쇼 도중에 한 여성 관객이 “아이 러브 유 미치”라고 소리치자 게이너는 “아이 러브 유 투”라고 응답했는데 그런 정경을 보면서 스타와 팬 간의 사랑이란 참으로 끈질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가 끝날 때쯤에 가서는 게이너는 아예 맨발로 무대를 오락가락하면서 노래하고 흘러간 인생살이를 들려줬는데 노래보다 얘기가 더 많다시피 한 쇼였지만 내가 공연을 보러 간 중요한 이유는 노래보다도 게이너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이어서 상관없었다.
마지막은 ‘남태평양’ 노래들의 메들리로 장식했는데 노래가 끝나면서 게이너는 “아이 러브 유 소 머치”라며 우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정말로 쇼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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