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라는 단어에 성별이 있다면 그건 여성형이 아닐까? ‘인고의 세월’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여성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프랑스어에서 ‘인고(endurance)’는 여성형이다.
남성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여자의 일생’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그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칠거지악’ ‘삼종지도’ 등 차별을 숙명으로 살았다. 남성에 의지하지 않고는 삶이 불가능했고, 그렇지 않은 삶을 알지 못했다. 전통사회의 질서의 큰 축은 여성의 인고에 빚을 지고 있다.
여성해방, 여권운동은 한마디로 여성에게 ‘참지 말라’는 외침이다. 모든 부당한 차별을 ‘부당하다’고 인식하고 ‘부당하다’고 외치라는 의식화 작업이다. 미국에서 여권운동이 생활 속으로 파고든지 50년, 여성들이 참기를 거부하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다.
최근 ‘남성의 종말’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여성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이 지난 2010년 커버스토리로 썼던 내용을 보강해서 책으로 냈다. 정확한 제목은 ‘남성의 종말 : 여성의 부상(The End of Men: The Rise of Women)’. 남성의 시대가 끝나고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변화의 핵심으로 저자는 경제력을 꼽는다.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게 되면서 고학력 - 고소득 군으로 빠르게 진입하는 데 반해 남성들은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뒤로 처진다는 것이다. 여권운동 측면에서 보면 ‘승리’인데 그렇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더 이상 참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있다. 결혼과 가정이 흔들리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늦추거나 안 하고, 그만큼 출산율이 떨어지고, 반대로 이혼은 증가하는 현상이다. 여성들이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다물고 3년’을 참을 필요도, 생각도 없는 것이다.
‘남성의 종말’에서 저자는 통계와 실례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도도한 흐름을 감지하는 데 수치가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가 그 흐름을 살아왔다. 첫 번째 징조는 학교 교실에서 나타났다. 남매를 키운 부모들의 경험은 대개 비슷하다. 딸은 차분하고 야무지게 자기 할 일 잘 하는 모범생, 아들은 덤벙대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교실에서 말썽 피우는 골치 덩어리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남자아이들은 늦돼서…” 했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나의 친구 중에도 대조적인 남매를 둔 케이스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키지 않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딸은 지금 일류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단 낮잠부터 자고 봐야 했던 아들은 변변치 않은 대학 나온 후 취직이 안돼서 몇 년을 허송세월 했다. 서른 넘어 뒤늦게 다시 직업전문학교를 나온 후에야 몇 달 전 겨우 취직을 했다.
로진에 의하면 저학력 부모 가정에서 딸과 아들의 차이는 특히 두드러진다. 아버지가 고졸 이하의 학력인 경우 딸이 대학을 졸업할 확률은 아들에 비해 훨씬 높다. 아들은 대학에 간다 해도 대개 중퇴를 한다.
이런 개별적 사례들이 모여서 나오는 통계가 여성 3명이 학사학위 받을 때 남성은 2명이 받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은 석사학위 취득자의 60%, 법대와 의대 졸업생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지난 2009년 사상처음으로 박사학위 취득에서 남성을 추월했다. 고학력은 자연스럽게 취업으로 이어져 전통적으로 남성이 차지하던 직업과 지위로 여성들은 급속도로 뻗어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관리직과 전문직 종사자 중 여성은 지난 1980년 26.1%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51.4%이다.
여전히 남녀 임금격차가 있고 포춘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 중 여성은 3%에 불과하다. 하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등은 여학생’이 당연시 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이 또한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딸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있다. 반갑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걱정이 없지 않다. 학력과 소득이 높아지면서 미혼인 여성들이 늘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배우자감을 찾는데 그런 남성을 찾기 어려우니 여성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44세 여성 중 결혼한 사람은 1970년 84%였던 것이 지금 60%로 떨어졌다. 이 연령층에서 대학졸업자는 이미 여성이 남성에 비해 많다.
아들을 잘 키우는 일이 부모들에게 새로운 숙제이다. 교육전문가들은 남자아이들이 자기통제력, 집중력, 언어능력에서 뒤지는 것이 학력차이를 만든다고 보고 있다. ‘여성 시대’가 될수록 아들이 걱정이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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