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리 집 김치냉장고 계기판에 붉은색 불이 들어오면서 “점검”을 하라는 글자가 경고음과 함께 반짝거렸다. 김치 냉장고의 겉은 새것처럼 멀쩡했지만 그 기계의 속을 알 수 없으니 대책이 있을리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수리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겪은 황당했던 경험 덕분에 김치 냉장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동안 간과(看過) 하고 있었던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계기도 되었다.
그간 간과하고 있었던 일 중의 하나는 대부분 사람들이 내면(內面)보다는 외면(外面)을 더 중시하고 또 이를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정이나 학교와 사회에서는 물론 교육학자들까지도 내면을 강조하는 인간교육,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성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린 학생들의 마음의 창에서는 “점검”해 보라는 붉은 글자가 소리 없이 반짝거리고 있어도 경고음이 안 들린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겉은 멀쩡한 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나무라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한 마디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를 꼭 후렴으로 덧붙인다. 이처럼 많은 부모가 자녀가 겪고 있는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있다해도 “뭐가 부족해서 걱정거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무심하게 넘겨 버리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생활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재하자유구무언(在下者有口無言)의 전통이 아직도 우리 생활 주변에 남아있는 탓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겉은 멀쩡한데 속으로 멍이 들어서 세상을 등지려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다. 한국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 2010년에 청소년 자살자(10세에서 19세까지)는 353명으로 하루에 약 1명 (0.97명)이 자살한 셈인데 이들 10대 청소년이 자살 충동에 빠지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간섭통제에 따른 스트레스”와 “소통 부재와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또 사단법인 세계빈곤퇴치회가 지난 5월부터 두 달 동안 전국의 가출청소년 423명을 심층 면접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와 소통이 안되어서” 그리고 “부모와의 갈등, 지나친 간섭, 차별, 가족 간의 소통 부재” 가 원인이라고 지적한 응답자가 전체 면접에 응했던 청소년의 55.1%나 되었다. 결국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의 병이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등지게 하는 원인이 된 셈이다.
이처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부모가 발달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만이라도 갖고 있었다면 자녀와의 대화는 물론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신의 눈높이에서 자녀를 대하다 보니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까지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곤 한다. 한국청소년상담원의 한 홍보위원은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상담을 하면 1년 이상이 걸리지만 부모님과 상담을 병행하면 3개월 이내에 심리치료를 마친다”고 한 말은 부모 의 역할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특성에 대해서는 “때가 돼서 그러나 보다”하고 내버 려두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때를 잘 이해하고 다스려주는 역할이 부모 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 사회교육기관이 해야 할 일은 “자녀양육 상담(parenting counseling)” 프로그램이나 “부모교육 과정” 등을 개발하여 새내기 부모나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에게 자녀양육과 발달에 관한 최소한의 지식만이라도 갖추고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성적관리를 위해 학원을 찾아 보내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네들의 소리를 들어주는 일이다. 늘 느끼는 일이기는 하나 역시 부모 되기는 쉬워도 부모 노릇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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