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여러번 이사를 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 다녀보면 햇빛이 좋은집과 달빛이 좋은 집이 있다.
보통 햇빛이 좋은집은 남향인 경우가 많고 달빛이 좋은 집은 동향인 때가 많다. 지금 우리 부부가 사는 이 작은 집은 정 동향이어서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햇빛이 눈부시게 비춰서 여름에는 오히려 블라인드를 쳐야 할때가 있다.
집은 작지만 베란다가 넓어서 그곳에 소파도 놓고 작은 테이불과 의자가 있어서 손님이 많이 온날은 요긴하게 식당으로도 쓰인다.
나는 이 베란다에 난이며 몇개의 화초도 기르면서 이곳에서 독서도 하고 차도 마시고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도 떨어가며 지내고 있다. 달이 뜨는 밤은 또 각별한 운치가 있어서 소파에 앉아 한동안 그 달빛에 취해 보기도 한다.
내가 사는 이 로스모어는 특별히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 가지에 걸린 달빛을 바라보며 한밤중 들리는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 신비하기도 하고 으스스 몸이 떨리기도 한다.
지금부터 12년전,내가 아직 육십대 초반일때 나는 한번 몹쓸병에 걸린적이 있다. 자궁암이란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내 생이 이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까하고 절망적이던 날 밤,이층에 올라 가보니 잠들어 있는 남편의 얼굴이 달빛에 눈물 자욱이 얼룩져 있는 걸 보니 나보다 남편이 더 불쌍해 통곡하고 운적이 있다.
그동안 너무 건강하게 살아온 내가 갑자기 암이란 진단을 받고 나보다 마음이 약한 남편이 더 충격을 받아 쓸어져 울다가 지쳐 잠든 남편을 보고 그때 내가 결심 한것이 있다. 이제까지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남편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성인이 되었고 제 앞가름을 할수 있는 나이에 도달했는데도 나는 아직 아이들을 떠나 보낼 준비를 못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놓인 끈을 놓지 못하고 미련하게 붙들고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제 내가 앞으로 돌볼 사람은 아이들이 아니라 늙어가고 있는 남편인 것이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남편들이 그렇겠지만 내 남편은 누구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하며 살았다. 나이 삼십도 되기 전에 우리 두 아이들을 데려다가 아버지가 되어 주었고, 늘 그 아버지라는 이름에 충실했다.
생각해 보면 남의 자식을 기르는 일 만큼 팔자가 센것도 없다. 제 속으로 난 자식은 야단을 쳐도 괜찮지만 남의 자식일때는 얘기가 다르다. 그래서 의붓 아버지, 계모며 콩쥐팥쥐라는 옛이야기도 생겨났나 보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남의 아이들을 기르는 처지였다면 어떨까. 아마 난 내 남편이 보여준 사랑의 절반도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지만 소심한 성격이어서 왠만하면 그냥 지나가고 대범한 성격인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젊을때는 많이 다투었다. 소심한 성격인 사람들은 결국 적극적이고 대범한 사람들에게 지게 마련이어서 늘 손해를 보고 산다. 한 사람은 휘둘며 살고,또 한사람은 휘둘리며 살게 된다. 모든 부부들의 유형이 이 범위 안에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심한 사람들은 부부가 싸우고 나서도 꼭 풀지 않으면 자신들이 견디지 못한다. 그 반대로 대범한 사람들은 곧 상대방이 항복할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유자적하고 얄밉도록 여유만만 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부부들이 싸움은 많이 해도 이혼도 않하고 잘 살고 있다.아마 상대방의 다른편이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면이 오히려 매력이 되고 융합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나이와 함께 변한다.이십,삼십대의 불꽃 같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사오십대의 중후한 사랑과, 육십 칠십이 되면 육신적인 매력보다 영혼이 함께 하고 인생이라는 기나긴 길을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로서의 친구 같은 편안함이 더 중요한 덕목이 되지 않을까.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남편들이 불쌍하다고 한다. 젊어서는 여우 같았던 마누라들이 늙어서는 호랑이로 변해 그 눈치를 보고 사는 남편들이 의외로 많다. 통계적으로도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더 오래 살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도 아내들은 잔소리를 늘어 놓게 되고 그래서 남자들은 종이 호랑이가 되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일부러 마나님들에게 져주는게 편하다는 것을 나름대로 터득했나 보다.
지난번 성경공부 시간에 얼마나 부부끼리 자주 서로 사랑해!하며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 등장했는데 거의 모두가 자주는 커녕 일생에 한번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란적이 있다. 우리 세대는 아마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 그런 표현을 많이 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이 러브 유!사랑해!고마워!땡큐! 이제는 이런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면 인생이 더 아름다워 질것 같다. 남편이나 아내만이 아닌 주위에 있는 친구나 이웃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쓴다면 내 삶은 더 여유로워 지지 않을까.
오늘 밤이 아니라도 달빛이 좋은 밤이 찾아오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부디 남편의 손을 잡고 사랑해!하는 그 따뜻한 말을 연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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