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어른들이지요. 어린 나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부분 꿋꿋하게 공부를 하고 미국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랑스럽습니다.”
LA 민족학교의 윤대중 사무국장이 말하는 ‘애어른’은 서류미비 청소년들이다. 어려서 부모 손잡고 미국에 왔는데, 자라고 보니 자신이 ‘불법체류자’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 소위 ‘드리머(DREAMer)’들이다. 이민법의 강고한 덫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들이 요즘 희망에 부풀어 있다. 오바마 행정명령으로 불체 청소년 추방유예조치가 실시된 덕분이다.
한인사회에서도 여러 기관들이 추방유예 신청을 돕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불체 신분의 한인 청소년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신청서 접수가 시작된 지난 15일 전후로 10여일, 민족학교로 걸려온 전화만도 4,000통이 넘는다. 남가주는 물론 네바다, 멀리 조지아에서까지 문의전화가 쇄도해 6~7명 자원봉사자들로는 감당이 어렵다고 한다.
‘드리머’는 일종의 사회적 사생아들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땅에 발 딛게 된 존재들, 그런데 이민서류 상 존재하지 않으니 실재하는 존재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편으로 밀쳐진 존재들이다. 16살이 되어도 운전면허를 딸 수 없고, 어떤 주에서는 공립대학 진학도 금지되며, 대학을 졸업해도 합법적으로 취직을 할 수가 없다.
한두명도 아니고 2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언제까지나 투명인간 취급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였다. 지난 2001년 연방의회에 드림(DREAM, 미성년 이민자를 위한 계발 구제 교육) 법안이 상정되고, 이들에게는 드리머라는 이름이 붙었다. 15살 이전에 미국에 와서 5년 이상 거주하며 고교과정을 마친 30세 이하 불체자들을 말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단 하나(서류 상 기록) 빼고는 어느 모로 보나 미국인”인 이들에 대해 추방유예 명령을 내린 것은 드림법안이 아직도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연방상원에서 공화당의 저지로 좌절된 후 드림법안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추방유예는 말 그대로 임시조치이다. 이들 젊은이에게 노동허가를 주어서 추방당할 염려 없이 일을 하게 하는 데 단, 기한이 있다. 2년간이다. 주에 따라서는 운전면허도 취득할 수 있다.
드림법안 통과를 기다리며 12년을 보낸 드리머들은 타는 가뭄 속에 빗줄기를 만난 듯 환호하고 있다. ‘임시’라고는 해도 그 첫 물방울이 너무도 달고 반갑다. 추방유예 신청서를 작성하며 이들은 해방감과 안도감을 털어놓는다.
“보통 아이들은 당연히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들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다니, 해방된 기분이에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어요. 드디어 전공을 살릴 기회가 왔어요.”
한편으로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2년 기한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추방유예 신청이 거부되면 이민국에 보고한 내용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건 아닌지 … 두려움이 없지 않다.
한창 싱그럽고 푸르러야 할 나이를 암울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드리머들. 힘든 현실에 분노하고 좌절하고 때로 엇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거칠고 아픈 조건이 ‘진주’를 만들어 내기도 하니 삶은 신비롭다.
남가주의 대학원생인 J는 9살 때 미국에 와서 10대 중반 불체 신분이 되었다. 친구들 모두 하는 운전을 자신만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춘기에 많이 반항하고 방황했다. 그러나 20대 후반이 된 지금 그는 드리머로서의 삶을 ‘축복’이라고 말한다.
어려운 조건이 자신을 강하고 성숙하게 만들었고,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면서 그는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드림법안 지지를 호소하는 대학생 시위에 앞장섰고, 경제적 평등을 촉구하는 ‘점령하라’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는 어느새 준 사회운동가가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난 각계각층의 정의감 넘치는 친구들과의 교분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 그는 말한다.
“가려던 길이 막히니까 다른 길을 찾게 되고, 그 다른 길에서 정말 많은 것을 얻었어요. 그러니 축복이지요.”
소수계 이민 커뮤니티인 한인사회에서 사회의식 투철한 이런 청년들은 특히 필요하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이웃을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는 젊은 일꾼들이다. 한인사회가 이들을 키워야 하겠다. 그 푸른 청년들을 품어 안고 사회를 위해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 미국답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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