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한두 블록 멀리 세워두고 아이와 손잡고 걸어서 등교하면 얼마나 좋을 까요? 집에서 10분만 일찍 나오면 되는 일인데요.”
LA의 3가 초등학교 수지 오 교장이 늘 하는 말이다. 등교시간마다 학교 앞에서 벌어지는 교통 혼잡이 가히 전쟁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략 10분 사이에 수백대가 몰려들어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이 급한 부모들은 이중삼중으로 정차한 채 아이를 내려놓고, 그도 못 기다리는 부모는 건너편에 차를 세워 아이가 횡단보도도 아닌 길을 건너게 하는 위험천만한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부모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개학으로 더욱 심해진 교통체증을 뚫고 출근을 해야 하는 압박감 때문이다. 방학동안 늦잠 자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가방 챙겨 차에 태우고 학교 앞에 내려놓는 것으로 1차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주차장 같은 프리웨이에서 열 받고 스트레스 받으며 분초를 다투는 출근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이 어디 그뿐인가. 방과 후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숙제 챙기고, 시험점수 1~2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태권도며 축구, 피아노 레슨 등 과외활동 시간 짜 맞추고 차편 제공하느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전쟁이 전개된다. 아이에게는 자유 시간이 없고, 부모에게는 자기 시간이 없는 현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미국이 전 같지 않다. 명문대학, 성공적 커리어에 대한 집착이 날로 강해지면서 아이도 어른도 삶이 고달프다. 30년 전과 비교해 미국의 어린이들은 자유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부터 너무 할 일이 많다.
아이가 바쁘면 그 뒷바라지하는 부모는 그만큼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직장일이 녹록한 것도 아니니 특히 직장 가진 엄마들의 삶은 완전 곡예다. 저녁 준비하면서 아이들 숙제 봐주고 상 차리고 이메일 체크하는 등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40%에 달한다. 이 모든 ‘전쟁’을 불사하며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자녀의 성공.
한국도 미국도 ‘헬리콥터 부모 전성시대’이다. 부모가 현미경 들여다보듯 아이를 관리하고 할 일, 갈 길을 정한다. 그래서 정작 가족이 같이 지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데 이것이 과연 최선일까? 아이도 지치고 부모도 지치는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있다. 좀 느긋하게 자녀를 키우자는 ‘느린 양육’, ‘슬로우 패어런팅’이다.
북가주의 수잔 리프먼이라는 여성은 최근 ‘빠른 세계에서의 느린 양육’라는 책을 펴냈다. ‘슬로우 패밀리’ 운동을 전개하는 그가 ‘느림’에 눈을 뜬 계기 역시 등굣길의 혼잡이었다. 지금 16살인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느 날 자동차들이 뒤엉키고 여기저기서 빵빵 거리는 학교 앞 아수라장을 보면서 그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더라고 했다. 이렇게 허겁지겁 살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멀리 차를 대고 걸어서 아이를 등교시키는 일로 시작해 삶의 초점을 느림에 맞췄다고 했다. 우리가 옛날에 하던 식의 삶이다. 인위적인 과외활동으로 아이를 시간의 틀에 가두는 대신 자연 속에서 많이 뛰어놀며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느림의 교육으로 성공한 나라가 핀란드이다. 핀란드는 학교 교육에서 세가지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적다. 시험, 숙제, 수업일수이다. 시험은 가능한 한 안 보고, 숙제는 하루 한 시간이면 충분히 하고, 수업일수도 미국보다 짧다. 아이들은 아이들로서의 삶을 만끽하며 자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학력이 선진국 최고수준이라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력평가 프로그램(PISA)에서 핀란드는 읽기와 과학에서 각각 2위, 수학에서 3위(2009년 기준)를 차지했다. 미국은 읽기에서 15위로 OECD 평균수준.
핀란드에 버금가는 국가는 한국과 싱가포르인데 한국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 지는 우리가 잘 안다. 한국의 학력이 ‘헬리콥터 부모’ 효과라면 핀란드의 학력은 ‘느린 양육’의 효과이다.
‘슬로우 패어런팅’은 ‘슬로우 푸드’와 맥을 같이 한다. 서두르지 말고 느리게 그래서 참 맛과 의미를 즐기자는 것이다.
다른 부모들이 모두 ‘헬리콥터’인데 혼자만 ‘슬로우’를 내세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녀를 다 키운 부모들이 보면 핀란드 교육은 일리가 있다. 아이의 등을 떠밀고 닦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가 지나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결국 아이들은 누구나 제 속도로 갈 뿐이다. 새 학기를 맞아 학부모들이 너무 조급하지 말았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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