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문턱이 나는 참 좋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문턱에는 방학이 있고,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문턱에는 가슴 설레는 새 학기가, 그리고 겨울의 문턱에는 눈과 성탄의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에는 늘 어떤 준비와 의식이 동반하게 마련이어서 누군가는 새 옷을 사 입고, 누군가는 커튼과 이불을 바꾸고, 누군가는 새 계절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우리와 각별하게 지내던 소중한 지인 한 분은 음악 CD를 만들어 나누면서 새 계절을 맞곤 했다. 한 계절을 지나면서 좋아하게 된 노래를 모아 CD로 만들어 가까운 이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음반 표지를 계절에 맞게 디자인하고, 음악의 분위기에 맞는 제목을 아내의 시집에서 골라 타이틀까지 붙여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CD를 만들어 주곤 했다. 재즈, 클래식, 팝, 뽕짝을 두루두루 섭렵한 분이어서 계절의 문턱에서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선물이었다.
2008년 봄의 문턱에 받은 CD의 표지에는 부인인 배미순 시인의 시, ‘봄비에 관한 명상’의 한 구절이 실려 있고, 선곡의 부연 설명까지 부록으로 들어 있었다.
“지난 석 달 동안 선곡을 한다고 거의 500곡 이상을 새로 찾는 맛에 유별나게 눈 많던 이번 시카고의 겨울을 즐기면서 지냈습니다. 특별히 선곡해서 특별한 분들에게 드리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나눌 소중한 분들이 곁에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중략) ‘Dancing in The Moonlight’은 들으면서 몇 년 전에 다녀 온 산타모니카의 초가을 밤에 춤꿈들이 야외에서 모여서 정말 분위기있게 탱고를 추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조금은 싸늘한 바람과 그리고 어둠, 그 사이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면서 행복한 얼굴로 조용히 춤을 추던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중략) 노랫말처럼 떠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숙연하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
18곡 CD를 만들기 위해 500곡 이상을 들을 정도로 매사에 프로의 자세로 임하던 그 분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이 되었다. 여행지에서 부고를 접한 남편은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던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두 달 전만 해도 암 투병하는 환자 같지 않게 등을 곧추 세우고 두 시간 이상을 바둑에 몰입해 두 게임 모두 이겨냈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고 했다.
고인은 음악뿐 아니라 좋은 것은 뭐든 나누는 분이었다. 손수 요리한 음식으로도 우리에게 위안과 행복을 선사하곤 했는데 한 번은 모임에서 출장요리까지 해주었다. 식재료는 물론 조리 기구까지 직접 챙겨 와서 만들어 주었던 해물 리조토의 맛은, 그 날 이후 우리 모두 되새김질하며 음미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고인은 또한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던 분이었다. 암 투병하던 지난 삼 년 동안에도 한 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계속할 정도로 책을 사랑했다.
매 순간을, 하루하루를, 신비의 샘을 발견한 듯한 경이로움으로 맞았던 고인은 인생의 계절에서 봄을 살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늘 봄으로 살겠다고 했다. 자신의 삶도 봄처럼 생명력이 약동하듯 살았지만, 주위에 지쳐있거나 도움이 필요한 지인을 보면 봄이 되어 주었다. 용기와 활기를 주고 따스한 햇볕이 되어 주었다.
마라톤을 여러 번 완주한 경험으로 우리에게 뛰는 훈련을 코치하면서 강조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남을 쫓아가려 하지 말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고인의 삶이 그러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서, 모든 상황에서 고유한 멋과 주님의 은혜와 섭리를 찾아 그 안에서 행복해했다. 고마워했다.
암투병마저도 그렇게 했다. 그 고약하기 그지없는 병마를 은총이라고 했다. 여태까지의 삶을 뒤돌아보고 정리하면서 아내와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음이 감사하고, 마음을 비우고 화해의 시간을 허락하심을 감사한다고 했다.
우리들과 꼭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산티아고 도보순례를, 스페인이 아니라 시카고에서 했다. 철저히 준비해서 아내와 함께 두 분이 한 걸음 한 걸음 순례를 했다. 야속하게도 우리 없이 순례를 마치고는 하늘나라에서 환한 모습으로 이렇게 소감을 전한다. 생전에 늘 그리 하셨던 것처럼.
“참 좋아예!” “고마워예!” “또 봐예!”
이영옥 대학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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