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적에는 여름이면 꽈리를 따다가 불고 봉선화 꽃잎을 따다가 손톱에 물들이곤 하던 것이 큰 하나의 놀이였다.
물론 그 시절에는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빨간 꽈리를 보면 무슨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그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꽈리는 마치 등불 처럼 생긴 타원형의 껍질 속에 빨갛고 동그란 알 사탕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작은 구멍을 통해 속을 완전히 제거하고 입으로 불면 그 작은 구멍을 통해 소리가 나기 때문에 그 재미로 가지고 놀았던것 같다.
나는 해마다 여름 방학때면 과수원이 있던 부평에서 우리 사촌들과 함께 꽈리도 따고 손톱에 봉선화 꽃물도 들이면서 그렇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봉선화는 백반을 넣고 곱게 찧어서 손톱마다 그것을 바르고 정성스레 헝겁 쪼가리로 매놓고 밤새 자고나면 손톱이 붉은색으로 변하던 것이 또 그렇게 신기할수가 없었다.
어느날은 밤새 자고 나면 어떤 손톱은 이미 봉선화 꽃물로 싸놓았던 헝겁쪼가리가 빠져서 손톱에 꽃물이 잘 들지 않아 속상해 하던 것도 마치 어제 일인양 선하다.
이제는 아마 시골에서도 이런 풍습들은 다 사라지고 대신 온갖 색깔의 메니큐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조금 촌스러워도 그렇듯 자연의 것을 가지고 놀던 그때가 때 묻지 않고 순수했던 것 같다.
요즘 건강식이다 유기농법의 채소다 해서 너도 나도 건강에 목메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어릴때 밭에서 뚝 따서 먹던 풋고추며 호박이며 오이와 각종 야채들이 바로 자연에서 나던 건강식 바로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앞 마당에 멍석을 깔고 보리를 적당히 섞은 밥에 된장국과 호박 지지미,열무 김치에 감자 조림만 있으면 온 식구들이 밥 한그릇을 뚝딱 하던 그 저녁 한때가 가장 소박하고 행복했던 한 여름날이 아니었나 싶다.
저녁이면 한나절 내내 찬 우물에 담궈 놓았던 수박 한통을 잘라 하늘에 촘촘히 빛나던 별을 세며 식구들이 나누어 먹던 그밤,밤새워 들려주던 어른들의 구수한 옛이야기도 새삼 그리운 추억의 하나다.
요즈음 올림픽 축제로 온 세계가 들썩인다. 우리 한국인들이 입은 유니폼이 최고의 유니폼으로 선정 되었다고 뉴스는 전한다. 지금부터 64년전,1948년 런던 올림픽때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입었던 유니폼은 담요로 물을 들여 그 더운 여름날 입고 나갔다는 얘기를 듣고 새삼 감회가 깊다. 그 시절 코리아는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였다. 그 때 우리 형부도 축구선수로 그 올림픽 선수단에 끼어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로 벌써 세상을 등진 분이지만,새삼 런던 올림픽으로 그분의 관한 기억이 떠오른다. 술을 한잔 드신 날이면 늘 그 시절을 얘기했고,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때 돌쟁이였던 조카애가 육십이 되었으니 세월이 지나도 한참을 지나갔다.그분은 하모니카를 잘 부셨다. 가끔 데니보이며 이탈리아 민요를 부시곤 했는데 그 메아리가 여름날의 밤공기에 퍼져 어쩐지 어린 내게 슬프게 들리곤 했다.
그 시절 나와 함께 놀던 사촌 동생도 열여덟 꽃 같은 나이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음은 모두 슬픈 것이지만 그애의 죽음만큼 내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없었다.
나는 매일 들꽃을 따다가 그애의 유골이 묻친 과수원의 한적한 길가에 놓아두곤 했다. 그애의 유달리 큰 눈과 늘 그애가 입던 빨간 원피스가 눈에 밟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육이오때 부산으로 피난간 그애가 그리워 혼자 과수원의 원두막에 올라가 큰 소리로 현숙아!하고 부르곤 했다. 내가 대학 일학년 기숙사에 머물던 시절, 그애는 나를 보러 마지막으로 면회를 왔다.
그애는 언덕길을 내려가며 몇번이고 나를 돌아다 보며 또 돌아다 보며 사라져 갔다. 나도 그날 황혼이 물드는 그 언덕길에서 차마 발길이 안떨어져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그것이 그애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벌써 오십년도 더 지나간 기억이지만 아직도 나는 가끔 그애를 꿈에서 만나고 그럴때마다 나는 그 꿈이 하도 생생해서 눈물 짓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아직도 꿈속에서는 우리들은 열여덟살 소녀들이다.때 묻지 않고 순수하고 예쁜 머리를 갈래 머리로 땋아 늘인 꿈을 먹고 살던 소녀들이다. 그러나 그런 소녀들은 이제 간곳 없고 낯설고 늙은 얼굴만이 거울 속에 있을 뿐이다.
며칠전 동네 꽃가게에 들렀다. 거기 놀랍게도 붉은색의 꽈리 한다발이 항아리에 꽃쳐 있다. 세월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가 어릴적 그렇게 풀밭 속을 헤메며 찾던 그 꽈리였다. 이 꽈리를 본적이 얼마만인가.미국에서는 여간해서 볼수 없던 꽃이라고는 부를수 없는 그 꽈리다.
그 모양이 등불을 닮았다 해서 등불(랜튼)이라고 쓰여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귀한 물건을 다시 칮은 기분이었다. 그 꽈리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저장되어 있는가. 아름답고 슬프고,다시는 오지 않을 추억들이---.문득 어디선가 어릴때 듣던 봉선화란 노래가 들리는것 같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 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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