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식탁보의 끝자락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는 행사 동안 식탁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엎어 놓은 물 잔이 있는 식탁에 반쯤 기댄 빈 의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미 육군 8240부대의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는 은퇴한 스토이 대위는 접시와 수저가 정갈하게 놓인 식탁에 대하여 설명을 하며 전쟁에서 포로된 자들과 돌아오지 않은 군인들을, 너무 쉽게 잊혀진 그들을 기억하자고 강조한다. 하얀 식탁보는 조국의 전투 준비 명령에 부응한 그 의지의 순수성을, 그래서 후세가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한다. 촛대 위의 외로운 초는 압제자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고독한 포로의 연약한 모습을 상징하며, 붉은 장미는 전쟁에 나간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믿는 가족의 마음이며, 빵 접시의 신 조각 레몬은 그들을 데려오지 못하여 그 가족이 겪는 처참한 운명을, 소금은 그 가족의 눈물을, 꽃병을 묶은 노란 리본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굽히지 않는 결의, 그리고 그것을 청원하는 수천 전우의 해진 옷깃을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여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많음을 꼭 함께 기억하자는 낭독에 장내는 숙연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공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록이 우거진 유월의 하늘은 청명하였다. 동족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한국 전쟁이 터진 날도 이와 같이 푸른 생명이 충만하고 아름다운 유월이었을 것이다.
8240 주한 국제 연합 유격군대를 기리는 기념식이 노스캐롤라이나의 페이어트빌 시에 있는 공수 및 특수전 박물관에 이 행사를 주관한 스토이 대위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의 미주 베트남 참전 전우 임원들이 참석하였다.
이 부대는 한국 전쟁 때 미군에 의해 모집된 대다수의 이북 청년들로 미군 아래 훈련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던 게릴라부대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일명 군번 없는 부대라고도 통한다. 하지만 종전 후 이들의 존재는 미국 정부에 의해 비밀에 부쳐졌고 8240 미 육군 특수 부대에 속했던 수천 명의 이북 청년들은 정부로부터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6.25동란이 끝나자 이 ‘군번 없는 용사’들의 값진 희생은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졌고, 한미 양국 정부로부터 그동안 외면당했지만, 이제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남편을 따라 임원들과 함께 기념식이 있는 박물관에 도착하니, 이미 며칠 전에 이곳에 도착한 스토이 대위는 이 기념행사를 선두 지휘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어느새 백발의 미국 노병들과 그 가족이 하나씩, 둘씩 오기 시작했고 이내 자리가 꽉 찼다.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서로 뜨거운 악수를 하였다. 살아 돌아온 자들이다.
우리와 함께 온 워싱턴 한국 8240 부대 장회장과, 북 캐롤라이나 베트남 참전 전우회 회장과 임원, 그곳 한인회 회장과 동포 그리고, 교육 연수차 한국에서 온 한국군인 등 약 25여 명의 한국인이 식에 참석하였다. 내심 더 많은 한국인이 참석하여서 8240 미국 특수 부대원들에게 이 뜻깊은 날,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 기념 헌석을 위해 한국 보훈처에서 전영진 사무관이 왔다. 제막된 돌에는 한미 양국의 국기가 새겨져 있으며, 아울러 주한 국제 연합 유격군 이라는 말과 “북한에서 전투 작전을 수행한 용감한 한국의 유격대원들과 미국의 특수 부대원들을 기리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라는 양국의 말로 쓰여있었다. 스토이 대위와 전 사무관은 노병 15명에게 일일이 증명서를 건네고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우리는 잊지 않았고, 우리는 이 날을 기다렸고, 그리고 감사하다는 깊은 뜻으로 악수와 포옹을 전하는 두 한국인의 모습에 노병들은 한껏 감동되고 흐뭇한 표정이었다.
스토이 대위에게 오늘은 특별히 더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따라 미국에 이민 온 후, 육군에 지원한 여군으로서 얼마 전에 대위로 퇴임하였다. 그 이후 몇 년째 전쟁 역사에 관한 일을 맡아 세계를 다니며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고향이 황해도인 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버지 역시 8240부대에서 전투하였지만, 특수한 상황으로 그 사실이 늦게 인정되어 그 딸에 의해 오늘 증명서와 메달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 날을 며칠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킨 장한 딸이고 장한 한국인이다.
문득 보름 전 현충일에 워싱턴 베트남 전쟁 기념 벽 앞에서 있었던 행사가 기억났다.
남편이 베트남 참전 전우이기에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91도의 무더위 속에 그늘 한 점 없는 의자에 앉아 몇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사수한 것은 오로지 오바마 대통령이 지금부터 2025년 까지 향후 13년을 베트남 전쟁을 재평가, 조정하며 역사를 바로 잡을 것을 선포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느꼈던 그 감격이 오늘 새롭게 다시 느껴졌다. 그동안 국민과 사회로부터 외면 당했던 베트남 전우들의 희생이 올바르게 재조명되기까지 기다려 온 그 불굴의 의지를 기억하며 오늘 8240 부대원들의 값진 희생도 기다린 긴 세월이 억울하지 않도록 계속 재조명 되기를 바란다.
그 식탁의 주인이 속히 돌아 와 저 의자에 앉고, 그리고 가득 채운 잔으로 높이 축배를 들 것을 간절히 기다린다.
기다림이란 이렇게 간절한 것인가, 기다리는 동안은 전쟁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모든 전우는 언제까지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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