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집 떠나기 전날, 엄마는 여행 가방에 아버지의 여름옷을 차곡차곡 넣고 한복판에 볶음 고추장과 마늘장아찌가 든 병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두 달 남짓 멀고 먼‘런던’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레슬링 시합을 하러 왜 ‘런던’까지 가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선친(황병관)이 레슬링 웰터급 선수로 참가했던 1948년 14회 런던 올림픽.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한 첫 올림픽 대회였다. 당시 나는 5살이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12시간 거리지만 기차와 배와 비행기를 갈아타며 부산, 일본, 홍콩 등지를 거쳐 20일이나 걸려 도착한 런던이었다. 나는 선친과 고인이 되신 어머니, 페더급 선수 겸 레슬링 감독으로 참가했던 김극환 씨로부터 첫 올림픽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김극환 씨는 선친과 일본 메이지 대학 동문으로 대학 레슬링 팀 주전멤버로 활약했으며 뒤에 대한 아마 레슬링 협회 회장을 지냈다.
아버지의 런던 행은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어금니의 통증이 심해지며 고행길이 되었다. 런던에 도착한 아버지는 선수촌으로 지정된 런던 교외의 초등학교 교실에 김 감독과 같은 방을 배정받고 여장을 풀었다. 긴 여행에 지친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에 떨어진 사이 아버지는 선수촌을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견딜 수 없는 치통으로 여독마저 잊은 아버지는 치과를 찾아 이국 땅 낮선 길거리로 나섰다.
아버지는 선수촌 앞에서 지나가는 버스에 대고 ‘런던’을 외쳐댔다. 버스 한 대가 섰고 아버지는 주저 없이 올라탔다. 번화한 거리가 나오자 아버지는 무작정 내렸다. 아버지는 행인을 붙들고 몇 마디 영어 단어와 몸짓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용케 아버지를 치과병원으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tooth’와 ‘pain’ 두 단어를 써서 치과의사에게 보인 뒤 엄지와 검지로 이를 뽑는 시늉을 하고 진료 대에 누웠다. 치과의사는 몇 마디 중얼거리다가 어금니를 뽑아내고 간단한 치료를 해주었다. 치료비 계산은 쉽게 해결했다. 아버지는 소지한 영국 지폐와 주화를 두 손바닥 위에 내놓았고 의사는 알아서 치료비를 챙겼다.
아버지는 교통경찰에게 도움을 구해 차를 얻어 타고 선수촌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배짱과 기지로 엮인 아버지의 모험담(?)은 팀 동료의 실종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김 감독에 의해 삽시간에 선수촌 안에 퍼져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아버지를 아는 선수들은 영어도 유전되느냐며 아버지를 놀렸는데, 이는 조부(황욱)가 일본 릿교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학자였기 때문이었다. 영어를 몰라 외출을 꺼리던 선수들이 용기를 얻어 런던 거리를 활보토록 하는데 아버지는 크게 기여했다.
어금니를 빼고 경기에 임한 아버지는 4회전까지 진출, 메달에의 꿈을 키웠으나 웰터급 우승자인 터키의 야사도구와의 4회전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으로 근소한 차로 판정패해 5위에 머물렀다. 판정에 이의를 품은 한국선수단은 소송비 10 파운드를 내고 상소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위원회는 오심을 인정해 심판의 자격정지를 시켰을 뿐 판정을 뒤집지 않았다.
선친은 메이지대학 재학 시절 동양 챔피언에 올라 일제 치하의 한국 유학생들이 어깨를 펴고 캠퍼스를 활보케 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올림픽에 참가한 때는 세 아들을 둔 30세 가장이었다.
선친은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써가며 평양 등 대도시 길거리에 가설 링을 설치하고 관중들에게 레슬링 시범을 보여주는 등 레슬링을 조국에 보급하는데 온 열정을 쏟았다. 6.25 전쟁 중에도 피난지 부산에서 정부 관계자를 설득해 도장을 마련하고 피난 나온 젊은 레슬러들을 규합, 조직적인 훈련을 시켜 15회 헬싱키 올림픽에 대비토록 했다.
64년 만에 다시 런던을 찾은 대한민국 올림픽 선수단을 보며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비록 34세의 짧은 삶을 사셨지만 ‘한국 레슬링의 대부’란 별칭을 얻은 선친은 패자의 매너를 유난히 강조하던 스포츠맨이었다. “졌다고 승자를 깎지 마라. 승자를 치켜세우면 패자도 따라 올라간다.” 한국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하고 패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황시엽 /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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