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여러 지인들과 애리조나 호피(Hopi) 인디언 마을을 찾았다. 호피는 ‘평화의 사람들’이란 뜻이며, 인디언이라는 호칭은 원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오인한데서 나온 말이다.
유력한 설에 의하면 아시아 북쪽의 몽고족이 수천 년 전에 동쪽으로, 동쪽으로 오다가 얼음으로 덮여 있던 시베리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지금의 알래스카로 걸어서 건너왔다고 한다. 그 후 아메리카 대륙 각지에 퍼진 인디언들의 총 인구는 유럽인 도래 이전에 대략 1,000만명을 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 버금가는 독자적인 고대 문명을 꽃피웠다. 마야, 잉카, 아스텍 문명이 그것들이다. 이들은 농사, 집짓기 그리고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600년 경 유럽인들이 들어온 후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퍼진 홍역과 천연두 등으로 인구가 급감하였고, 아메리카 정복을 위한 열강들과의 전쟁 속에서 학살과 노예화로 계속적인 쇠퇴의 길을 걸었다. 1830년 이후 ‘눈물의 행진’으로 불리는 미국 정부가 지정한 척박한 보호구역에 강제이주 당하는 비극의 역사를 맞게 되었다. 19세기 말까지 저항하는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끝에 북미대륙에서의 대 인디안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호피 인디언 부족들도 스페인군과 다른 부족들에 쫓기고 밀려서 애리조나의 황량한 사막 복판에 살게 되었다. 흙과 돌로 만든 집이 있는 곳은 해발 8천 피트 높이의 절벽 꼭대기로 주위의 연한 땅이 침식되어 깎여나가고 암석이 남아 평평하게 된 작은 고원 같은 곳이었는데, 탁상이란 뜻의 ‘Mesa’라고 불리고 있었다. 햇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눈을 뜨기가 힘들었고 햇살은 따가웠다.
마을의 색깔은 오직 한 가지, 황토 빛이었다. 나무가 거의 없었는데 그 곳에 사는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기 위하여 화단을 만들고 꽃을 심었다고 한다. 그 곳에는 인디언과 결혼하여 사는 한인 여성도 있었다. 영국인을 사랑하여 결혼했다는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가 생각났다.
일부 호피 인디언들은 옥수수, 콩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우리 팀은 어린이 사역, 창고를 지어주는 건축, 가정을 방문하여 냉장고를 고쳐주는 일과 희망(Hope)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했다.
나는 환자들을 돌볼 기회가 있었는데 마을의 심각한 문제는 술, 마약, 당뇨, 비만이었다. 당뇨 환자들 중에 밤에는 당이 정상이거나 약간 낮은데, 아침 혈당치는 오히려 높아지는 현상이 많았다. 이렇게 혈당수치가 새벽 여명에 내렸다가 반작용으로 다시 올라가는 현상을 ‘여명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약 복용시간을 바꾸어 줌으로써 조절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당뇨병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애리조나의 인디언들에게는 당뇨가 특히 많다. 인디안 부족들은 공통적으로 검약 유전형질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검약 유전형질(thrifty genotype)이란 “음식물을 잘 흡수하고 효율적으로 잘 저장할 수 있는 유전형질”이다. 이는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로 넘어올 때나 식량이 부족했던 때는 생존에 도움이 됐지만, 식량이 풍부한 현대에 이르러 비만과 당뇨를 일으키게 되었다.
애리조나의 인디언들은 1950년대 미국정부의 대규모 식량지원이 시작된 후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며 TV 보는 것이 일상이 되면서 초원에서 말을 타고 사냥하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은 백인들 대신 비만과 당뇨라는 새로운 적과 맞닥뜨리게 됐다.
슬픈 역사를 가진 인디언들 중에는 분노와 좌절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는 숫자가 많았으나, 요즘 다시 전통을 되살리면서 힘과 소리를 높여가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웃과 자연과 잘 조화하며 온건하고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들의 마음과 지혜는 위기에 직면한 21세기 아메리카에 절실히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호피 인디언 마을의 밤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총총한 별들은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어두움이 짙어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는 여명을 기다린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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