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신문이 또 수난을 당했다. 이번에는 무려 세 군데나 뜯겨나갔다. 두 군데는 손바닥 크기로, 한 군데는 거의 반 페이지나 잘려나갔다. 한 달 새 세 번째이다. 어쩌다 펼쳐든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케이스가 세 번이므로 실제 범행 횟수는 더 많을 것이다.
범인 수색에 나선 형사처럼 뜯긴 자국을 면밀히 조사해보았다. 가위를 사용한 흔적은 없다. 도서실 직원들과 주위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레 손으로 뜯어낸 게 틀림없다. 문화면을 뜯어간 것으로 미루어 보면 범인은 문화인의 탈을 쓴 미개인 같다. 구인 광고란을 뜯어갔다면 신문 한 부 구입비 75센트라도 아끼려는 곤궁한 처지를 동정했을는지 모르겠다. 퇴근 뒤 자주 이용하는 어느 시립 도서관에서 마주친 사건이다.
한인 사서의 특별 배려로 미주 발행 한글신문을 도서관에 비치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만약 도서관측에 범행이 알려지면 그 한인 사서는 쥐구멍을 찾고 싶어질 것이다. 공공 도서관의 한글 신문을 자기 집에서 구독하는 신문처럼 여기는 코리안은 과연 어떤 얼굴의 소유자일까? 낯을 감추고 낯부끄러운 짓을 하는 그 코리안을 상상하면 내 낯이 뜨거워진다.
도서관을 거쳐 들르는 운동 클럽에도 내 낯을 뜨겁게 만드는 코리안이 있다. 그는 수건을 휴대하지 않는다. 샤워하고 젖은 몸은 무엇으로 닦을까? 그건 그에게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다. 운동 클럽에 비치된 두루마리 종이 타월이 있기 때문이다. 사용량에 제한이 없다 하더라도 종이 타월 풀어 쓰는 그를 보노라면 내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가 종이 타월 풀어내는 시간은 거의 30초쯤 될 것이다. 그동안 그는 주변의 이목을 끌어 모은다. 그는 한 수 더 떠서 몸을 다 닦고는 종이 타월을 둘둘 말아 싸들고 나간다.
그날도 샤워를 마친 그가 당당한 자세로 종이 타월을 풀기 시작했다. 둘 둘둘…… 종이 타월 풀리는 소리. 둘 둘둘········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계속 이어지는 소리.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싶다. 옆에 있던 한 백인이 그를 잠시 쳐다 보다 나를 향해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든다. 너희가 동족이 아니냐며 비웃는 듯한 표정이다.
나의 동족을 흘끔 훔쳐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가 한국어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쳐다보기는, 쪽 팔리게··· ”
그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쪽 팔린다’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 내가 써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방금 쪽 팔리는 행위를 저지르고도 쪽 팔린다고 나를 향해 불만을 털어놓다니···.
1980년대 우리 언어생활 속에 들어와 빠른 유행을 타고 표준국어 대사전에도 등재된 이 말은 ‘부끄러워 체면이 깎이다’는 의미의 속된 표현이다. 부끄러운 일로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 때 흔히 쓰는데 부끄러운 일이 밥 먹듯이 자주 일어나는 요즘의 유행어가 되었다. 아마 도덕 불감증으로 무엇이 쪽 팔리는 행위인지 분별을 못하거나 알고도 부끄럼을 무릅쓰고 쪽을 파는 사람이 늘어나는 탓인 것 같다.
문제는 쪽 팔리는 짓을 하지 않고도 쪽이 팔려버리는 억울한 피해자가 많다는 데 있다.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당사자의 쪽이 팔리는 거야 자업자득이요, 인과응보 아닌가. ‘쪽 팔리다’의 어원이야 어찌됐던 피동형의 이 표현에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양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뻔뻔함이 담겨있다.
타민족 눈에는 제 얼굴이나 내 얼굴이 다 같은 얼굴로 보이는데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동족의 얼굴을 ‘쪽’으로 격하시켜 싸구려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겨서야 쓰겠는가. 최근에는 은밀하게 몸을 파는 한인들이 미국 주류언론에 오르내려 동포들의 낯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팔려나간 ‘쪽‘을 회수해서 본래 얼굴로 복원시키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종이 타월을 한손에 잔뜩 말아 감은 그와 나의 시선이 급기야 맞부딪혔다. 나를 잠시 째려보던 그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국 분 이슈?”
나는 호흡을 고른 뒤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또렷한 한국어로 대꾸했다.
“아닌데요.”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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