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이 되면 아버님이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1950년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북한 공산군은 기습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순식간에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맥아더 사령관 주도하의 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국군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으며 전쟁이 끝나는가 할 무렵 중공군은 100만명의 인해전술로 아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정구 소위는 소대장으로서 최전방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하순부터 전세는 중공군에 유리하게 되어갔고, 국군과 연합군은 작전상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김정구 소위가 속했던 3군단 7사단 5연대도 1월 초순, 평안도에서 강원도 춘천까지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7사단 3연대가 강원도 영월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공군은 아군보다 3배 많은 병력으로 3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아군을 독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국군 7사단 3연대, 약 3,500명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다급해진 7사단장 김형일 준장은 훈련이 가장 잘된 부대원 30명을 차출하여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본부에서 100리가량 떨어져 있는 3연대장 정진 대령에게 작전명령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작전 개시 불과 몇 시간 만에 30명 전원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태가 더 긴박해지자, 7사단장은 일선 전투경험이 있는 정보장교 1명과 호위병 2명을 뽑아 포위망을 뚫으라고 지시하였고, 김정구 소위가 차출되었다.
김정구 소위는 첫 번째 작전이 실패로 끝난 것을 잘 알고, 자신의 머리카락 한줌과 손톱, 발톱을 깎아 이름을 쓴 봉투에 넣어서 사단장에게 드렸다. 사단장은 “여러분이 애국 애족하는 길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요, 죽어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산모퉁이까지 배웅해 주는 오 대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김정구 소위는 평소 읽었던 성경 구절을 되뇌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김정구 소위와 호위병 2명은 며칠 전 내린 함박눈으로 새하얗게 된 산등성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적막 속에서 가끔 새소리와 나뭇가지 우는 소리만 들리는데 과연 중공군들과 맞닥뜨리지는 않을는지? 고지를 하나 넘고, 두 번째 고지를 넘어갈 때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 빵”하고 터진다. 세 사람 모두 뒤로 나자빠지면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살아 있고 주위는 너무나 적막하다. 살펴보니 너무나 긴장한 호위병이 본인의 총 방아쇠를 잡아 당겨서 난 총소리였다. 다시 일어나 달렸다. 넘어지며 달리며, 고지를 2개째 넘었다. 이제 하나만 더 넘으면 되는데, 멀리서 중공군들의 모습이 보인다. 호위병들은 가족들이 생각났던지, “김 소위님, 옆으로 도망갑시다. 이젠 정말 지쳤습니다. 계속 가다간 우리 모두 개죽음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정구 소위는 결단을 내렸다. 권총을 뽑아들고, “나를 따라오든지 아니면, 내 총에 죽든지 하여라. 여기서 우물쭈물하면 어차피 죽는다. 앞으로 전진하는 길만이 우리도 살고 전우들도 사는 길이다.” 마지막 고지를 넘을 때 적들의 소리는 들렸으나 마주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해 그림자가 어둑어둑해질 때 어느 동네어귀에 도착하여 우물가에 매복하였다. 물 길러 나온 군인 한 명을 덮쳤더니, 아! 아군이었다. 곧 3연대장 앞으로 안내되었고, 연대장은 김 소위를 와락 껴안는다.
즉시 연락이 개통되었다. “사단장님, 3연대장 정진 대령입니다. 내일 새벽 작전명령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날 밤의 달은 고향에서 보던 달처럼 유난히도 맑고 밝았으며, 그 속에서는 방아를 찧는 토끼와 어머니의 모습이 같이 보였다. 동이 터오며 중공군의 포위망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자유를 수호해 주신 김정구 소위님, 나의 아버님 감사합니다. 어려움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마다 아버님처럼 용기를 내겠습니다. 김정구 퇴역소령은 수여 받은 은성, 화랑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시지만, 조국을 위해 눈 속에서 사라져간 전우들을 생각하면서는 눈시울을 적신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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