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첫 유화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한국에서 미대를 졸업한 지 30여년만이다. 애초에 미국 올때는 미술공부를 계속하는게 꿈이었다. 그런데 가난한 유학생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때를 놓쳤다. 그 뒤론 각박한 이민살림을 꾸려가느라 화가의 꿈도 접은 셈이었다.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나는 늘 풍경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자연의 따뜻한 품속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아내가 쓴 초대장의 첫 연이다. 꿈을 포기한 줄 알았던 아내가 초로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꾸고 있음이 고맙다. 아직도 행복하다니 마음이 저리다. 아내의 대학동기들 중에는 몇번씩 국내외 유명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 중견화가들이 여럿 된다. 그들의 활동 기사를 볼 때마다 조촐한 개인전도 못 열어준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여류화가들엔 물심양면으로 밀어주는 외조가 필수라는 데 손재주가 없어 그림틀조차도 제대로 짜 주질 못한다.
아내의 그림은 거의 풍경화다. 편안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멀리 바라 볼 수 있어 시원하다. 높은 산에 오르면 모두 멀리 본다는데 아내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정말 가슴이 뻥 뚫린다. 학생때는 추세 탓이었는지 난해한 추상쪽이었는데 미국에 살면서 큰 풍광의 아름다움이나 작은 정원의 들꽃, 그리고 비어있는 벤치가 그녀의 오브제다.
“산들바람 부는 들판과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흔들림/ 부드럽게 굴러가는 구릉과 맞닿은 하늘가에 피어오르는 뭉게 구름/ 홍시처럼 붉게 익는 황혼을 바라볼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아내가 행복을 느끼는 건 사람보다 자연이란 고백에 수긍이 간다. 수십년간 이민교회를 다니면서 별난 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쌓인 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남 탓 할 주제도 못된다. 직장일로, 만학으로, 취미생활로 늘 바깥으로 나도는 남편때문에 홀로 외롭게 갱년기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그림에 더욱 집착한 게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유독 풍경화를 좋아하는 건 아내의 심성 탓이기도 하다. 순전한 신앙을 할머니때 부터 물려받은 아내는 자연 속에서 조물주의 손길을 남편의 숨결보다 더 가까히 느끼고 있음을 자주 느낀다. 가끔 산책을 하거나 하이킹을 나가면 아내는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느라 늘 뒤쳐진다. 휴가를 가서도 곁에 사람들보다 홍싯빛 황혼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화폭에 그 잔상을 담곤 했다.
“모네도 40여년간 연못과 정원을 그렸어요. 파리를 떠나 시골 지베르니에 칩거하면서 250여점의 풍경화를 남겼대요” .아내는 모네의 ‘수련’을 확대해 화실벽에 걸어두고 있다. “연못 가에 이젤을 여럿 세워놓고 햇빛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변하는 물의 풍경과 색채를 화폭에 담았대요. ‘수련’ 속엔 바깥 세상, 물에 비친 세상, 그리고 연꽃이 물밑으로 스며드는 그림자까지 무한 공간이 스며있어요. 마치 소우주를 담은 듯 해요.”
아내는 모네의 그림에서 소우주를 보고, 또 자연 속에서 조물주의 대우주을 찾고 싶어하는 듯 하다.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 중에 자아를 확인하고, 조물주의 임재를 담으려고 애쓴 풍경화가 세월이 가면서 작은 화실을 그득히 메우기 시작했다.
넌즈시 전시회이야기를 꺼내면 손사래를 쳤다. “아직 멀었어요. 모네는 노년엔 시력이 나빠지면서 점점 연못에 더 가까히갔대요. 자연히 위에서 내려다 보게 돼 수면자체가 화면이 되었다는데..” 아내도 나이들면서 남들이 못보는 걸 화폭에 담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러던 차에 아내는 미국화단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후배들을 만났다. 해연, 진이, 영희 후배들이 산호세 근교, 사라토가의 예쁜 화랑을 소개하고 자신들 일처럼 전시회를 주선해 주었다. 아내가 홀로 몇년 간 그린 자연 풍경의 그림들은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아내의 풍경화 원근 구도의 소실점엔 꼭 빈 벤치가 놓여있다. 화면의 중심에 시선이 집중 소멸되는 곳이다. 빈 벤치는 조물주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리라고 아내가 설명하지만 나는 왠지 외로왔던 그녀의 빈 마음 자리처럼 보인다.
그 벤치에 아내와 함께 따뜻한 사랑으로 도와준 사람들을 초대해 떠가는 구름을 보고싶다. 홍시처럼 붉게 익은 황혼도 바라보고 싶다. 감사 기도가 절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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