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명은 내가 다섯살이던 무렵 2차대전 때 공습을 피해 우리 가족이 소위 소개라고 불리던, 피난을 갔던 곳의 이름이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우리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황해도의 오지로 이사를 갔다. 기차를 타고 달구지도 타고 가면서 어머니는 우리 네명의 자식들을 거느리고 일가친척도 없는 그 시골의 벽촌으로 가셨다.
거의 칠십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왜 나는 아직도 그곳의 산천 풍경과 그 지명까지 환하게 외우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 그곳은 내가 살아생전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곳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한 2년쯤 살았을 때 해방이 되었고 우리 가족은 다시 기차와 달구지와 배를 타고 몽금포에서 마포로 돌아오던 기억까지 난다.
그 당시는 2차대전 말기여서 물자가 귀해 돈이 많았던 젊은 과부인 엄마도 신발이나 생활 필수품을 사기가 어려워 나는 매일 내 발에 맞지 않는 커다란 신발을 끌고 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늘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가끔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그곳의 기억은 조그만 초가집과 집 뒤에 달려있는 텃밭과 마당 앞에 툭 터진 넓은 논들과 밤이면 온갖 짐승들이 울던 작은 동산이 있고, 논길을 걸어가면 맑은 물이 졸졸대며 흘러가던 시냇물 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생각들이 난다.
내가 태어났던 인천은 항구였고 큰 도시여서 물자가 풍부했고, 어릴때 기억으로 군것질 할 것도 많았지만 백천 온천에서도 사십리나 더 들어간 금산면 대아리는 시골도 아주 촌구석이어서 나는 늘 알사탕이나 셈배 같은 과자가 먹고 싶어 어쩌다 읍내에서 열리는 5일장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장이 서는 날은 엄마 손을 잡고 가서 알사탕이며 엿이며 유과나 떡을 사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학교가 파하고 시골 아이들과 십리 길을 걸어오면서 길가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따고 어쩌다 재수가 좋은 날은 풀 속에 숨어 있는 싱아도 따 먹고 방아개비도 잡아 아이들과 함께 화로에다 구워 먹기도 해서 늘 엄마는 질색을 하셨다.
몇년 전 P 작가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갔나>라는 수필 집의 제목을 보았는데, 황해도 개성이 고향인 그분도 아마 어릴 때 나처럼 싱아를 좋아해서 그 맛이 고향과 고향집에 대한 향수로 남아 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싱아는 별로 맛은 없지만 길게 자란 몽통을 껍질을 벗기고 깨물어 먹으면 풋풋한 내음과 함께 약간의 향기가 났던 것이 기억난다.
황해도에는 구월산이라는 큰 산이 있는데, 몇 십리를 걸어서 엄마와 큰 언니와 함께 가을에는 도토리도 줍고 밤도 줍고 했던 기억도 새롭다.
큰 언니는 다음해 오월, 열아홉 나이에 언덕 넘어 마을의 큰 지주집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 가기 전 언니는 내가 다니던 소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싱그런 봄날 언니가 풍금을 치면 시골 아이들이 모여들어 멋쟁이였던 언니를 부럽게 바라보고, 그런 언니를 가진 나는 또 으시대기도 했다.
큰 언니는 큰 딸이었고 나는 막내여서 언니가 가마를 타고 언덕길로 가물가물 사라져 갈 때 나를 안고 눈물 짓던 엄마를 보고 덩달아 나도 슬퍼져 함께 울었다. 그때 겨우 삼십대 중반의 젊디 젊은 과부였던 엄마는 그때 남편도 잃고 큰 딸 마저 시집 보내고 그 외진 시골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니 지금도 나는 짠해진다.
그 8월에 해방이 되고 우리 가족은 시집간 큰 언니까지 함께 이복 오빠가 사는 서울로 돌아왔다. 오빠가 사는 집은 높은 언덕에 커다란 철제 대문과 열개가 넘는 돌 계단이 있던 성처럼 큰 집이었다. 드넓은 마당 안에는 그 집 말고도 작은 집이 두채나 더 있었다. 우리 식구는 다다미가 깔린 이층 집에 살게 되었다.
오빠가 살던 집 옆에는 사시사철 온 갖 꽃들이 피어있는 온실도 있었다. 오빠 부인이 일본인이었고 나보다 두살이 더 많은 남자 조카 애와 두세살짜리 아이들도 있어서 나는 자주 그 애들과 놀았다.
다행히 나는 일본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에 일본말을 잘해서 그 애들 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아직 일본으로 가지 못한 일본애들과도 잘 놀았는데, 가끔 비위가 상하면 "쪽발이들은 빨리 너희 나라 일본으로 꺼져"라고 소리치곤 했다.
우리 이복 오빠는 일본 여자 태생이어서 외모도 혼혈아처럼 생겼고, 공부도 일본서 했기 때문에 이질감을 느꼈고 또 과묵해서 어린 나에게는 늘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는 가끔 커다란 자신의 서재에서 이름도 모르는 클라식 음악을 들었고, 어느 때는 돈까스 같은 요리를 해서 우리집에도 보내곤 했는데 그 바삭하고 고소한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그는 그 당시 사회적인 정황이 친일파를 숙청하려는 민간 단체들 때문에 신변에 위험을 느꼈고, 결국 그런 감정들이 우울증으로 발전해서 나이 사십세에 자신의 동맥을 끊고 자살을 하고 만다.
일본 경도제대 법과를 나온 수재는 그렇듯 허망하게 일생을 끝마치고 말아서 우리 집안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일본 올케는 자신의 소생인 두 아이만 데리고 일본으로 가버려서 큰 조카는 그때부터 우리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벌써 육십년도 더 지난 아득한 얘기다.
언제 남북한이 하나로 통일이 될수 있을까? 내 생전에 실제로 그런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나는 가끔 내 유년기에 2년 남짓 살았던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대아리가 마치 고향인듯 그리워지고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다시 그 땅을 밟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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