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떠나고 싶은 날이 있다. 산더미 같이 쏟아지는 일들을 마무리한 후 심신이 지쳐있을 때면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남편의 사업이 한가할 즈음 망망한 바닷가를 자동차를 타고 끝없이 달리고 싶었다. 바로 그런 날 이곳에서 제일 먼 플로리다 최남단의 섬 키 웨스트로 향했다. 4월의 어느 일요일 밤 남편과 짐가방 하나씩 들고 야반도주 하듯 마이애미 행 비행기를 탔다. 새벽에 도착하여 렌트카를 계약하고 공항을 나오니 어둠이 걷히고 멀리 바다 쪽에서부터 황금빛 아침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마이애미 시와 마이애미비치 만 사이에는 수많은 섬들이 떠 있었다. 섬에는 스포츠스타, 연예인, 기업가 등 부자들의 별장이 있다고 했다. 별장 뒷마당 푸른 잔디밭 끝에 닿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바다도시 베네치아와 흡사하지만 더 좋은 점은 색색의 화초가 핀 정원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유람선, 요트, 모터보트 등 배들이 각자의 선착장에 매여 있었다. 개성 있고 멋진 다양한 건축양식의 집들을 보니 부자가 되어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 웨스트로 향하는 남쪽 바다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섬이 떠 있었다. 한 두 그루의 나무만 있는 작은 섬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물 위에 연필로 점선을 그어 놓은 듯 수평선에 떠 있었다. 겹겹의 수많은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하는 탓인지 파도도 없고 바람이 잔잔해서인지 일렁임도 없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살펴보아도 밀물 썰물의 구분도 없다.
키 웨스트까지 이어지는 122마일 거리를 연결한 전봇대는 모두 수심 얕은 바닷물 속에 서 있었다. 흰모래 위의 바다는 옥색, 해초를 품고 있는 곳은 에메랄드 색, 조금 깊은 곳은 사파이어 색 등 푸른 물감을 다양하게 풀어놓은 것 같았다.
철썩임도 없고 강처럼 흐름도 없어서 바다 가운데 배를 띄우고 낚싯대를 드리우면 하루 종일 배는 제자리를 지킨다. 잔잔한 호수 같은 드넓은 바다를 보니 끝없는 평화가 느껴졌다. 밤과 낮의 온도가 75도로 거의 비슷하여 일주일 체류기간 내내 지내기에 쾌적했다. 수온도 수영, 스노클링 등 물놀이하기에 적당했다.
모터보트를 타고 키 웨스트에서 15마일 거리의 바다로 나아갔지만 물의 깊이가 내 키를 넘는 곳이 드물 만큼 얕았다. 무릎 깊이도 안되는 곳은 빨간 깃발을 꽂아두어 배가 피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렇게 유순하고 만만해 보이는 곳이지만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는 허리케인이 불어 닥친다. 비를 동반한 폭풍이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리는 무시무시한 곳으로 돌변한다. 천혜의 선물만큼이나 시련도 준다.
키 웨스트는 헤밍웨이가 쿠바로 옮기기 전 글을 쓰면서 8년간 살던 곳이다. 문명의 냄새가 덜 나는 한적한 마을이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자동차로 서서히 달려 15분을 넘지 않는 아기자기한 곳이다. 쿠바까지는 90마일 거리이다. 쿠바 젊은이들이 헤엄쳐서 미국으로 건너온다는 말처럼 쉬엄쉬엄 수영하면 나도 쿠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일 긴 다리인 7마일 브리지를 포함하여 자잘한 섬들을 잇는 42개의 다리를 거쳐 다시 마이애미공항으로 왔다.
나이가 드니 자꾸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새로운 장소로 떠났다가 돌아오지만 만족스럽지가 않다. 꼭 가보고 싶었던 그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은 너덧 살 때 가 본 산골의 외갓집 같은 곳이다. 캄캄한 밤 뒷간을 가려고 댓돌을 내려서면 강 건너 멀리 마주 보이는 산이 병풍처럼 눈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둘러싼 산에서 불빛이 번쩍 거렸다. 산불인가 하고 빤히 쳐다보면서 외할머니께 물어보았다. 지리산 호랑이 눈빛이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온통 마법 같았던 어린 시절, 혼을 흔들던, 신비로운 세상에 대한 첫 경험같은 그런 느낌을 다시 맛보고 싶다. 시렁 위에 먹거리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그런 시절로의 여행, 다시 가볼 수 없는 그 때의 그곳 대신에 떠나는 여행은 어느 곳이든 만족스러울 수 없다. 떠날 때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떠났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겉도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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