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 하나 붙잡고 망망대해에 던져진 기분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사우스 LA에서 20여년 리커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 박진원씨의 말이다. 20년 전 4.29 폭동 터진 다음날 아침, 밤새 가슴 졸이다 달려가 본 가게는 불에 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은 캄캄하고 머릿속은 하얀 것이 도무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비통, 분노, 허탈 … 우리 모두의 머릿속을 암울한 잿빛 절망으로 채웠던 4.29 폭동이 20주년이 되었다. 당시 ‘망망대해’는 박씨 등 폭동피해자들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거대한 미국사회 한 귀퉁이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여린 싹을 갓 틔워내던 한인 커뮤니티가 뿌리째 뽑혀 망망대해에 내던져지는 충격이었다.
흑인 빈민층의 고향 사우스 LA - 한인상인들이 삶의 터전으로 발 디딘 곳은 박탈감과 적개심이 용암처럼 부글거리던 활화산이었다. 인종차별과 빈곤과 가혹한 공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폭발할 기회만 노리던 증오의 화산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있었다는 사실을 당시 우리는 알지 못했다. 로드니 킹 재판이 불만의 화약고에 불을 당기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성난 군중은 폭도로 변했다.
경찰은 신속하게 행콕팍, 베벌리힐스 등 백인지역 철통경비에 나섰고, 사우스 LA를 넘어 한인타운으로 북상하는 폭도들의 행렬에 눈감았다.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지는 분노의 대열 앞에 경찰은 나서지 않았고, 무방비로 열려진 한인타운은 약탈과 방화의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리고 20년. 흑백 인종갈등의 희생양이 되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참혹한 고통을 겪었던 한인사회는 재건에 성공하였다. 더 이상은 누구에게도 맥없이 당하지 않을 만큼 사회 경제 정치적 근육을 단단하게 키워 냈다.
한인이민사에서 가장 뼈아픈 경험 4.29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는 사우스 LA의 터줏대감이 된 박씨는 말한다.
“4.29 폭동은 내 인생의 철근이었습니다. 콘크리트에 철근이 들어가면 더 단단해지듯 폭동 경험은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폭동’이 상처로 남게 하지 않았습니다.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디딤돌’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성찰로 가능했다. 4.29 이전까지 대부분의 한인들은 스스로 ‘한국사람’이었다. 몸은 미국에, 흑인동네에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그들’과 사소한 연관성도 느끼지 않았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 노력한 만큼 보상이 따르는 곳”이라는 일념으로 하루 10여 시간, 주 7일, 일년 내내 휴가 한번 가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했다. 돈이 모이고, 집 장만하고, 고급 자동차 사고 … 흘리는 땀에 비례해 아메리칸 드림은 현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일하고 돈 버는 데만 열중해 사는 동안 우리는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 지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근면하고 성실한 모범 이민자 이미지 이면으로 돈에 너무 집착하는 민족,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흑인사회 중심으로 형성되며 그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했다. 박씨도 인정한다.
“우선 무서웠습니다. 덩치가 산만한 흑인이 들어오면 겁부터 났어요. 상대방은 내가 겁낸다는 걸 느끼고 더 기분 나빠 했지요. 매일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자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런 불안 속에서 손님은 그냥 돈 벌어주는 기계였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불탄 가게를 보험금과 중소기업청 융자로 다시 지어 새롭게 장사를 시작하면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손님들을 ‘사람’으로 존중하기로 했다. 관심 밖으로 밀쳐내고 멸시했던 이웃 주민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모임에 참여하고 관할 경찰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폭동 당시 40대였던 그는 이제 60대가 되었고, 그때 20·30대 손님들은 40·50대가 되었다. 무서워 피하고 싶었던 그들은 사귀고 보니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사는 불쌍한 이웃, 그러면서도 인정 많은 정다운 사람들이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별 일이 없는지 아는 20년 지기들이 되었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의 망들이 바로 그의 인생의 철근이다.
‘관계’에 대한 자각은 폭동 이후 커뮤니티 차원에서도 일어났다. 적극적으로 다른 커뮤니티들과의 소통에 나섰고 그렇게 만들어진 네트웍들이 다인종사회 미국에서 한인사회를 단단하게 지탱해주고 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 더불어 사는 지혜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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