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만큼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게 있을까?” 감탄하는 우리에게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이 보편화한 지난 10여년,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의 위력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물리적 거리가 허물어지고 지구가 한동네 같은 국경 없는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변화도 ‘세탁기’가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에는 비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최대공로는 가사노동 시간의 단축. 집안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여성들에게 시간여유가 생긴 것이 여성해방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물꼬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전제품과 피임약, 그리고 여권운동의 20세기를 지나면서 여성의 활동무대는 전통적 ‘집안’에서 ‘사회’로 확장되었다. 세상의 엄마는 ‘일하는 엄마’와 ‘집에 있는 엄마’ 두 종류로 나뉘게 되었다.
지난 주 미국사회에서는 ‘일하는 엄마’ 논쟁이 뜨거웠다. 엄마가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일’은 노동시장에서의 일, 그래서 봉급 받는 일을 의미하는 통념이 도마 위에 올랐다. 논쟁의 불씨가 된 것은 CNN의 정치해설가 힐러리 로젠의 발언. 민주당 전국위 고문이기도 한 그가 “앤 롬니는 평생 단 하루도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한 말이었다. 공화당 대선주자 미트 롬니가 여성들이 직면한 경제문제와 관련, 아내 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고 하자 이를 비판하려던 것이 말이 좀 엇나갔다.
로젠의 의도는 자명하다. 일하랴 자녀 키우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뛰면서도 재정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많은 여성들의 현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평생 돈 벌 필요가 없었던 억만장자 앤 롬니는 그런 절박함을 알 수 없을 것, 그러니 여성의 경제적 어려움에 관한 조언에 앤은 적임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앤의 반격은 즉각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여성과 경제’라는 본래의 주제는 밀쳐두고 ‘일’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내가 일을 안 하다니, 아들 다섯 키우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는 가. 직장 일과 자녀양육을 병행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나는 엄마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어느 쪽이든 각자의 선택일 뿐, 전업주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전업주부에 대한 진보진영의 공격으로 몰고 가면서 논쟁은 앤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엄마의 ‘일’은 선택의 문제인가. 롬니 가족 같은 부유층에서 주부가 사회적 성취를 추구하느냐, 아이들 잘 기르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전념하느냐는 개인적 선택이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에게 ‘선택’은 호사이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아이들과 생활이 안 되는 형편에 ‘엄마를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엄마로서의 무책임이 되기 쉽다. 남편 월급으로는 집 페이먼트가 안 될 때, 남편이 실직했을 때, 혹은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을 키울 때,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2010년 기준, 미국에서 어린이가 있는 가정 중 거의 절반은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 그리고 그 외 26%는 편부모 가정이다. 결과적으로 부모 중 한사람이 집에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는 3명중 한명이 채 못 된다. 한 세대 전인 1975년에는 그 숫자가 절반을 넘었다.
소득 중하위 계층으로 갈수록 여성은 취업을 피할 수 없다. 소득 최하위 20% 가정 중 일하는 여성 10명 중 7명은 남편보다 수입이 많거나 같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빈곤층이라는 말이다. 소득 중간계층 중 일하는 아내의 거의 절반은 가족부양의 책임자이다. ‘일’은 선택일 수 없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두, 70년대에는 절반 정도가 ‘일’하지 않았던 엄마들이 이제는 왜 이렇게 많이 일을 해야 할까.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실질임금이 제자리걸음이고 소득격차는 날로 커진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장하준 박사는 기업들의 주주가치 극대화 원칙이 오늘의 어려운 경제현실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주주들의 이익과 전문 경영인의 보수를 연계함으로써 근로자 임금, 투자 등의 비용을 무자비하게 삭감하고 주주와 경영진의 배만 불리는 구조이다. 그 결과가 ‘1%대 99%’의 극심한 빈부격차 그리고 엄마들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배경이다.
세상에 일하지 않는 엄마는 없다. 하지만 엄마 일에 직장 일까지 하는 엄마들은 그만큼 더 힘들다. 삶이 곡예 같은 ‘일’하는 엄마들의 현실을 알고 그들의 짐을 덜어줄 지도자가 필요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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