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冬) 사래바 하루(春) 도오카라즈! 내가 중학시절에 배운 일본말 한 토막! 우리 말로 바꾸어 말하면 ‘겨울이 물러가면 봄은 멀지 않았다’ 라고 했듯이, 꽃샘 추위가 겨울의 끝자락을 물고 늘어 지더니, 4월의 봄비가 겨울을 녹이고 지나간다.
다리운동을 위한 내 아침 산책길 보도 블록 잔디밭의 차가운 흙을 헤집고 피어난, 한 무리의 야생화(野生花)들! 나는 그 야생화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한쪽 켠에 비켜 서 외롭게 피어 있는, 내 엄지 손가락 크기의 앙증맞은 한 떨기 꽃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어찌보면 노란 들국화 같이 생긴, 이 갸날픈 꽃송이를 바라보면서, 목 디스코 수술 후 8개월 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고 집안에서만 갇혀 있다가, 얼마전부터 지팡이 없이 펭귄 걸음으로나마, 바깥 출입을 하게 된 내 모습을 본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나에게 있어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전에 없이 추운 겨울이었다. 게다가 집 안에서만 틀어 박혀 있으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바라본 그 곳, 본국의 겨울이 동토(凍土)의 땅 같이 느껴져, 더더욱 나의 겨울을 춥게 하였다.
그러나 계절의 한난계가 봄을 가르치자, 그 동토의 사람들은 겹겹이 껴 입었던 옷들을 애벌레가 껍질을 벗듯이 벗어가고 있었다. 겨울 내내 겹겹이 껴 입었던 옷을 봄볕과 함께 한겹 두겹 벗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람과 햇볕의 ‘나그네 옷 벗기기’ 시합에 관한 우화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밤이 어두울수록 아침이 더 밝듯이, 혹독한 겨울 후에 찾아 오는 봄이 더 따사하게 느껴지듯이, 이 한 떨기 야생화와 나의 봄은 더욱 따사한 봄임이 틀림없다.
수술 후 오코노 병원에서 베리메디칼센터로 옮겨져, 그 지옥 같은 재활훈련과 음식조절을 위해, 90살을 밑자리에 깔아 놓은 나는, 소태 같은 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내 주치의의 우려 섞인 말대로, 혹시나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하반신 마비란, 최악의 가파른 고지를 넘어가기 위해, 나는 죽을 힘을 쏟았고, 그리고 촘촘히 처진 철조망을 빠져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나의 인내심(忍耐心)은 그 높은 담과 철조망을 빠져 나가게 했다. 그래서 재활훈련 15일만에, 집으로 퇴원할 수 있었고, 집에 돌아 와서도 긴 나날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안에서 걷기 30분, 그리고 다리의 마비를 피하기 위한 천번의 자전거 패달 밟기를 계속했다.
그 결과 퇴원 후 20일만에 웰체어를 접었고 이어 20일 후에는, 워커(걸음 걸이 보조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퇴원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인 2월 말부터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서 이렇게 혼자 걷게 된 것이다. 그래서 봄비가 걷힌 아침 산책길에서 나는 나같이 동면에서 깨어 난 한 떨기 야생화와 마주하여 이렇게 동화 속의 장면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와 같은 악착 같은 인내와, 나의 의지력! 이는 어쩌면 내 인생의 전환기부터 싹튼 것인지 모른다. 그건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그것도 남이 가지 않는 야생화 같은 외로운 길을, 한국에서 15년, 그리고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에 이민 와서 15년, 이렇게 30년 세월을 송곳으로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뚫고 또 뚫은 그 인내가, 나를 소생시킨 것으로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길 걷기를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결과로 얻어진 성과(成果)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믿고 또 자부(自負)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까닭은 나에게 ‘우리나라 아동극의 개척자’라는 호칭(呼稱)을 붙여준 사실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도 초등학교 교사용 지도서에 동극 8작품 말고도, 초등학교 국어, 음악, 글짓기 교과서에 나의 동극 8편이란 최다(最多)작품을 수록한 작가로 공인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생존하고 있는 아동문학가 중에서도 최고령 작가이면서, 현재도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나의 끈기와 남달랐던 건강 유지가 뒷받침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유수의 출판사를 잘 만난 덕분에 아동문학가 중에서도 드물게 10권의 전집과 자서전, 아동극 이론서, 4권의 수필집을 포함한 34권이란 최다 작품집(책)을 발간한 작가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지난 50년 동안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나의 작품(동극)이 그 숫자를 가름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공연 되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시 또다른 비약을 위해, 다시 말해서 나를 내 고향 통영을 빛낸 문화 예술인의 대열에 끼어준, 통영시가 추진하려는 ‘주평기념관’ 건립의 타협을 위해, 송대관의 노래 ‘차표 한장 손에 들고 예정대로 떠나려 하네’ 의 가사를 떠올리며, 이달 말 한국행의 비행기표 한 장을 끊어 손에 들고, 4년만의 고향 나들이를 위해 몸을 추수리고 있다.
나는 한 떨기 야생화와의 대화를 끝내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여 걸어가면서, 벌써 그 곳 내 고향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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