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빼액-”하는 기적소리와 함께 연기를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저녁 어둠을 뚫고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면서 라흐마니노프의 장중하면서도 비감토록 서정적인 피아노협주곡 제2번이 흘러나온다. 이어 이번에는 다른 기차가 역시 전속력으로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달려간다.
이 장면은 우연히 기차역에서 만난 두 유부녀와 유부남이 짧은 사랑 끝에 각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가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영화 ‘짧은 만남’(Brief Encounter·1945)의 첫 장면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인데 지금도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영화의 제작자인 로널드 님도 이 영화를 볼 때면 운다고 말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는 기차는 알렉 하비가 타야 할 기차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기차는 로라 제슨이 타야 할 기차다. 둘의 사랑은 이렇게 기차 방향이 다르듯이 애당초 엇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대와 스크린 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던 영국의 극작가이자 각본가였던 노엘 카워드의 단막극 ‘정지된 삶’(Still Life)을 데이빗 린(‘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이 영상화한 이 영화는 로라의 영화이자 불륜의 영화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로라와 이상주의자인 의사 알렉은 키스 이상의 행위는 저지르지 않지만 사회 규율로 볼 때 둘의 사랑은 불륜이요 비도덕적이다. 과연 둘의 키스를 간통이라고 단죄할 것인지는 나로선 모를 바이나 린은 이 불륜의 스릴과 고통과 부드러움을 흑백화면에 시적으로 꽃을 피워냈다.
로라(실리아 존슨-이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 후보)와 알렉(트레버 하워드)은 해 저문 초겨울(또는 늦가을) 목요일 저녁 한 작은 도시 밀포드의 기차역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다. 둘은 각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둔 보통 사람들. 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무자비한 감정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둘은 짧은 만남의 날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혹독하게 겪는다.
로라는 샤핑과 영화구경 그리고 알렉은 병원 일을 위해 매주 목요일 밀포드에 왔다가 일이 끝난 뒤 알렉은 하오 5시40분 발 기차로 먼저 떠나고 잠시 후 로라도 기차에 오른다. 둘은 그 날도 각기 서로의 기차를 기다리다가 만나 결국 사랑으로 변하게 되는 짧은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는 로라가 알렉과 이별을 하고 귀가해 리빙룸에서 자기 건너편에 앉아 있는 무미건조하나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속으로 자신의 짧은 만남을 고백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눈이 큰 로라는 모처럼 찾은 알렉과의 사랑에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사랑이란 폭력적 행위가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로맨틱한 여학생처럼 희열하다가도 “우리가 서로를 자제할 수만 있다면”이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알렉의 말처럼 둘은 이미 이성을 찾기에는 늦어버렸다. 그래서 로라는 알렉의 “더스데이”(Thursday)라는 말에 “더스데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과연 로라의 남편이 ‘감정이 무디고 섬세하지 못하며 음악에도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로라가 한눈을 팔지 않았을 것인가 하고 궁금해 하곤 한다.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올리버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알렉은 기차를 타고 떠나는 로라(사진)에게 여러 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하오. 당신을 만난 것이 미안하오. 당신을 사랑한 것이 미안하오. 그리고 당신을 비참케 한 것이 미안하오.” 이 대사처럼 영화는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아름답고 진솔한 대사들이 많다.
로라와 알렉의 얘기는 우리 모두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이런 사실성은 존슨과 하워드의 평범한 모습 때문에 더욱 절실한데 둘의 조용하고 절제된 연기가 한 치의 가식도 없어 우리는 두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웃다가 또 탄식하고 절망하게 된다.
로라와 알렉의 만남과 이별은 모두 기차역에서 일어난다. 린은 늘 이별이 머무적대는 안개가 자욱한 기차역과 함께 달리는 기차와 기적소리 그리고 엔진과 율동적인 바퀴소리를 절묘하게 효과적으로 사용, 로맨틱한 ‘기차역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영화 내내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밀려오는 파도의 무게처럼 서러운 멜로디가 로라와 알렉의 못 이룰 사랑을 애처롭게 동반해 주고 있다.
결혼한 사람들이 뒤늦게 찾은 참사랑과 행복과 기쁨 그리고 그들이 행하고 견디어내야 하는 거짓과 죄의식과 수치와 비참을 곱고 고요하면서도 가슴이 파열될 만큼 통렬하게 그린 황홀한 작품이다.
이 영화와 함께 역시 카워드가 각본을 쓰고 린이 감독한 또 다른 영화들인 ‘국가를 위하여’(In Which We Serve·1942)와 ‘행복한 무리’(The Happy Breed·1944) 및 ‘명랑한 유령’(Blithe Spirit·1945) 등이 최근 크라이티리언(Criterion)에 의해 DVD 박스세트로 나왔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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