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어느 날 한 남자를 찾아왔다. “이보게, 오늘이 자네 날이야!” 남자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죽음은 “자네 이름이 명단 맨 위에 있다”며 막무가내였다.
남자는 꾀를 냈다. “식사라도 하고 떠나자”고 구슬린 후 음식에 수면제를 섞어 대접했다. 식사를 마친 죽음은 깊은 잠에 빠지고 남자는 명단을 고쳤다. 맨 위의 자기 이름을 맨 아래로 옮겼다. 얼마 후 죽음이 잠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자네가 내게 너무 잘해줬으니 오늘은 명단 맨 아래부터 시작해야겠어.”
죽을 운명이면 아무리 피해도 소용이 없다는 조크이다. 죽음은 점찍은 대상을 놓치는 법이 없고, 그렇게 누군가가 죽음을 따라 나서면 세상에는 그 빈자리로 인해 혹독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남는다. 우리 삶에서 가장 가혹한 스트레스, 사별이다.
지인 중에 1년 여 전 남편과 사별한 60대 후반의 여성이 있다. 여성 사업가로 활달하고 씩씩한 것이 특징인 그분이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근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산소를 찾아가던 것을 얼마 전부터 일주일에 3번으로 줄이며 현실을 인정하려 애쓰지만 ‘남편이 없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매일 세 가지를 다짐하며 살아요. 숨 쉬자, 밥 먹자, 잠자자. 고통이 너무 심하면 숨이 쉬어지지 않더군요. 숨 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결혼생활 40여 년 동안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어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기쁘고 슬픈 온갖 일들을 같이 겪어온 한몸 같은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심신이 작동을 멈추더라고 했다. 시각, 청각이 제 기능을 못하고,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운전을 하다보면 엉뚱한 데로 가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혼란스런 상황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마약을 구할 수 있다면 약이라도 먹고 싶었어요. 약의 힘으로 단 2시간만이라도 편안해지고 싶었어요. 마약을 수소문해서 사러 나갈 기력이 없었지요.”
부부는 ‘백년’가약을 맺고 영원히 함께 살 듯 결혼생활을 시작하지만 우리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다. 감정도 수명도 한시적이다. 사랑하던 감정이 변하면 부부는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고, 수십년 한마음으로 산 부부는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는다. ‘사별’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끝까지 지켰다는 ‘결혼 졸업장’ 같은 것이지만, 그래서 인생의 중요한 과정을 잘 이수해냈다는 의미가 되지만, 그 졸업장이 동반하는 고통이 너무 깊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사별 후 혼자 사는 노년의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2010년 기준 기대 수명은 한국 80.8세(남성 77.2세, 여성 84.1세), 미국 78.7세(남성 76.2세, 여성 81.1세)이다. 한국을 중심으로 기대여명을 보면 현재 60세인 남성은 21.1년, 여성은 26.2년의 여생이 있고, 70세인 남성은 13.5년, 여성은 17.3년을 더 살 것으로 기대된다.
젊은 나이의 예상치 못한 사망을 제외하면 부부가 나이든 후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대개 남성이다. 사별은 주로 여성의 몫이고, 그 시기가 60대 중후반이라면 여성은 적어도 20년을 더 산다는 계산이 나온다. 남편이라는 익숙한 길동무 없이 2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면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혼자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계절이 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희망이 꽃 피는 신혼의 봄, 아이들 키우고 집 사고 재산 늘리며 번창하는 여름, 자녀들 독립시키고 직장에서 은퇴하며 뒤로 물러나 앉는 가을, 그리고 배우자 떠나보내고 홀로 맞는 추운 겨울이다. 그 겨울의 한파에 지레 얼어 죽지 않으려면 홀로서기 연습은 필수다.
노후에 꼭 필요하다는 건강, 돈, 친구, 일은 사실 사별 후 더더욱 필요하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독립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자산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분산투자가 필요하다. 배우자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의존하지 말고 친구들과 두루두루 사귀며 교류의 폭을 넓혀 두는 것이다. 아울러 삶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신앙이 상실의 슬픔을 녹여주고 노후를 성숙하게 한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고 문정희의 시 ‘기억’은 시작한다. “일시에 세상이 흐린 화면으로 바뀌었다”고 이어진다. 한 사람이 떠나자 세상이 텅 비는 경험, 일시에 세상이 암울해지는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예정되어 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그 한사람의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시는 이어진다.
“네가 남긴 것은/ 어떤 시간에도 녹지 않는/ 마법의 기억/ 오늘 그 불꽃으로/ 내 몸을 태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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