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는 태초의 인간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생각했다. 달걀처럼 둥근 구형에 남성과 여성이 한몸에 있는 양성체라고 믿었다. 신과 인간이 어울려 살던 아득한 옛날, 양성체 인간은 힘도 세고 지적 능력도 막강해서 신에 맞설 만 했다고 한다. 이들 인간이 힘을 믿고 무례하게 굴자 신들, 아마도 제우스가 절반으로 갈라버려서 지금의 우리 모습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 것은 모두 이 사라진 반쪽에 대한 그리움, ‘나의 반쪽’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성별이나 성을 의미하는 섹스(sex)의 어원은 라틴어 섹수스(sexus)인데 이 말에는 갈라놓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제우스가 인간을 좀 더 정확하게 반분했다면 어땠을까? 인간의 몸에 가장 큰 생리적 부담인 임신·출산을 남녀가 똑같이 분담하도록 이분했다면, 남녀차별이라는 문제는 애초에 없지 않았을까?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한몸을 이룬다 해도 개체가 각각이니 이쪽의 어려움을 저쪽이 파악하지 못한다.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미국에서는 1909년 전국 여성의 날로 시작해 1911년부터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왔다. 여권운동이 펼쳐진 지 100여년, 그리고 “여권운동이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는 인식이 팽배한 21세기 미국에서 피임약이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경구피임약이 대중에게 합법적으로 판매된 지 52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피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의 여성인권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
발단은 고용주가 직원의 피임약을 건강보험으로 커버해주도록 규정한 오바마 헬스케어 법. 피임과 낙태를 반대하는 가톨릭계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이슈가 되었다. 공화당 측은 종교의 자유를 공격하는 처사라고 오바마를 맹비난했다.
이에 오바마는 가톨릭 계통 학교나 병원 등을 피임약 보험 의무화 대상에서 제외하는 대신 건강보험사가 비용을 부담하도록 수정했다. 해당 기관 여직원이 피임약을 구입할 경우 보험사에 직접 비용을 청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가톨릭 기관도 보험사도 만족하는 타협안이었다. 보험사로서는 임신 보다 피임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조용히 마무리 되어가던 피임 이슈에 불을 붙인 것은 러시 림보였다. 극우보수 라디오 진행자로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림보가 지난주 또 막말을 했다. 의회에서 피임약 보험혜택의 필요성을 증언한 조지타운 법대 여학생에 대해 ‘창녀’ ‘갈보’ 등의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 성관계에 왜 우리의 세금을 써야 하느냐? 그러려면 우리가 볼 수 있게 성관계 동영상이라도 올려놓으라”는 등 모독적인 말들이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닌 우리 보통 여성들은 혼자 힘으로 임신을 할 수가 없다. 모든 피임과 임신, 낙태는 남성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피임약도 낙태도 남녀 공통의 관심 사안이어야 마땅한 데, 이를 여성만의 문제로 보는 것이 전통적 가부장적 시각이었다. 림보가 극우 보수다운 시각을 드러냈고 몇몇 공화당 대선 후보들도 이에 합류했다.
여성이 가임 기간 내내 임신과 출산을 거듭한다면 어떻게 교육을 받고 사회진출을 할수 있을까.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어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나온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 미국의 여성해방운동은 산아제한운동에 한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대표적 피임 계몽 운동가였던 마가렛 생어는 임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한 어떤 여성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언제, 몇 명이나, 어떤 간격으로 낳을 지를 스스로 계획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여성은 해방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로 뉴욕 빈민가에서 일하던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들이 스스로 유산을 시도하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피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홀랜드에 가서 피임법을 공부한 후 1917년 뉴욕에 보건소를 설립, 여성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치고 피임기구를 나눠주었는데 오래가지 못 했다. 뉴욕 경찰국이 보건소를 폐쇄하고 그를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죄목은 음란물 배포.
20세기는 여성의 세기로 기록된다.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사회 각계로 나가 능력을 발휘한 여권신장의 전환기였다. 그런 변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피임약이다. 마침내 남성과 비슷한 몸의 자유를 얻은 여성들이 날개를 단 것이다.
태초에 남녀가 한몸이었다는 신화를 기억하자. 피임약 보험혜택이 어떻게 여성만을 위한 것이겠는가. 여성이 안정되면 한몸인 남성이 안정되고 그만큼 사회가 안정될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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