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께서 살아생전 입으셨던 초록 스웨터를 입고 거울 앞에 서본다. 거기에는 그 옷을 입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반백의 여인이 서 있다. 아! 내 젊음도 흔적만 남겨놓고 완전히 비껴갔구나. 눈을 감고 거울에 이마를 맞대본다.
그 초록 스웨터가 우리 집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첫딸에 이어 둘째로 아들을 낳은 그 해 겨울부터였다. 오랜 지병의 괴롭힘과 애옥살이 질곡에 인생이 녹아버린 어머니, 전 생애를 쥐어짜면 검붉은 고난의 엑기스만 쏟아질 것 같은 어머니, 그 가엾은 분에게 손자가 찾아옴으로 생애 가장 행복한 날들이 펼쳐지게 된다. 할머니 품에 안겨 손자가 병원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 두 사람만의 사랑 이야기, 그 아이가 사람을 알아보며 옹알이를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에이는 강추위에도 궁핍한 시골에서 먹거리 보따리들을 들고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그 먼 길을 초록 스웨터를 입으시고 눈보라를 앞세워 오시곤 하셨다. 그 옷은 껄끄러운 겉과는 달리 속은 아주 부드러운 안감으로 되어있는데 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잠투정을 하는 손자의 잠을 몰아다 주는 등덮개로도 쓰였고 아이의 이불도 되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주인공 아들 주위에는 어머니의 신체 한 부분이 같이 찍힌 것들도 여러 장 있을 정도로. 어머니의 등과 무릎은 늘 아들 차지였다. 아이가 서너 살이 되었을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할머니 가신다는 소리만 들으면 달려와 비척비척 걸으시는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나와 함께 배웅을 나가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고는 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실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에미야 여기 한 번 좀 봐다우” 하시길래 꼬리 뼈 부분을 봤더니 노란 종기가 자리를 잡은 것이 보였다.
병원에서는 지병의 합병증이라 했다. 한 번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살은 백약이 무효가 되었고 나중에는 꼬리뼈까지 보이면서 어른 주먹만한 큰 구멍이 생겼다. 환부로 인해 엎드려서만 주무셔야 했고 마약이 섞인 진통제만이 그나마 통증을 가라앉혀주었다.
그때부터 매일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의 문안 전화가 시작됐다. “할머니 오늘은 어떠세요, 아프다고 너무 울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할머니 집을 방문할 때는 냄새가 나는 할머니 곁에서 자고, 잡술 것을 떠 넣어드리고, 웃게 해드리려고 재롱을 떨면서 화장실을 가시려고 하면 그 조그만 어깨에 힘을 줘가며 할머니를 부축해 주었다. 병이 막바지에 이를 쯤에는 진통제 주사도 듣지를 않자 통증이 몰려오면 엎드려 기도하시던 성경책에 머리를 찧어가며 악을 쓰시고 비명을 지르셨는데 아들이 할머니 목을 감고 뒤범벅된 땀과 눈물을 닦아드리면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처절한 울음을 쏟아내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세월은 마지막까지 저녁놀 한번 펼쳐보지 못하시고 저물어갔다.
임종을 며칠 앞두고 정신 줄이 풀어져 버린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의 이름도 얼굴도 다 놓아 버리고 당신만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그러시던 분께서 손자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할머니 하면서 부르자 “아이구 내 새끼야 삼백육십 오일 건강해라” 마치 축복의 말씀을 준비하신 듯이 순간적으로 손자를 알아보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어머니는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똑바로 누우셨다. 오래 전 준비해 놓으신 수의를 입으시고.
초록스웨터, 나는 무엇보다 그 옷을 챙겨 넣었다. 훗날 아들에게 할머니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어린 아들은 가끔 우리와 함께 할머니 산소에 가서 뫼 똥의 잡초도 뽑아주었으며, 할머니 보라고 진달래꽃 나무도 함께 심어놓고 열한 살 가을에 할머니와의 애잔한 추억을 가슴에 품고 김포 하늘을 떠났다.
이제 어머니의 “예쁜 내 새끼”였던 아들은 삼십을 바라보는 심성 따뜻한 청년으로 자라주었고 해마다 추도식 날이면 할머니의 인생을 닮은 들꽃을 꺾어다 사진 앞에 놓는다. 훗날 내게도 손자들이 생기면 어머니 하신 것처럼 이 초록 스웨터를 덮어 잠을 재우리라. 아이가 잠투정을 부리면 엎고 나가 등덮개로도 쓰리라. 그리고 내 마음에 전설이 되신 증조할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아이들 재롱에 활짝 웃으시며 행복해 하시던 어머니가 아릿한 그리움으로 눈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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