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운동의 싹이 트면서 금주를 Dry, 음주를 Wet 이라고 표함
미국사회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교계의 음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금주를 주장하는 교파도 생길 정도로 음주의 악영향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초기이민의 대부분은 유럽 백인들인데, 특별히 이 사람들이 본토에 있을 때보다 술을 더 가까이 하게 된 이유는, 우선 술이 흔했고, 값이 싸기 때문이었다는 점과, 사교나 오락시설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적당한 음주는 개척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받는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피로를 푸는데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830년 현재, 미국인들의 술 소비는 1인당 1주일에 독한 증류주 1.7병이었다는 것이다. 2010년 현재의 개인당 소비의 3배 이상이다. 고로, 주취(酒醉-drunkenness)는 식민지시대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Benjamin Rush라는 의사가 1784년에 “과도한 알코올 복용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해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간에서는 술의 남용을 억제하자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는 등 금주운동의 기반다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과도한 주취라던가 주정 등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인 술을 악마의 희롱으로 인해 남용을 하기 때문에 자초하는 것이지 술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조였고, 과잉섭취(過剩攝取)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Rush박사의 학설이 발표되고 난 후 10년 동안 적어도 10개 주에서 금주협회가 생겼다.
금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개념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채 술을 끊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고, 여성들은 술로 인해서 가정이 파괴 될 가망성이 짙으므로 아예 술을 집안에 둔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선까지 가게 되었다. 개척기의 역사에서나 영화 등에서 묘사 되는 전형적인 중류가정 남자들의 생활을 보면,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저녁에는 하루에 피로를 푼다는 뜻에서 마시는 술을 과음한 나머지 귀중한 가정 저녁시간을 무산시키고, 아침에는 숙취를 가시기 위해서 해장을 하게 됨으로 해장기(氣)로 오전중은 흐리멍덩하게 지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오후가 되어 다시 술독에 빠지는 등 정신 차릴 사이 없이 소일을 하였다. 밤에 술을 많이 마시면 아침에 숙취(宿醉)에 시달리게 되는데, 한국에서는 통상 해장국 정도로 해장을 하지만, 미국에서는 chaser라고 해서 독한 칵테일을 마신다. Chaser란 쫓는다는 뜻인데 숙취를 쫓아버린다는 뜻이다.
1826년에는 미국금주동우회(American Temperance Society)가 결성되어 금주운동을 시작했다. 이 동우회는 점차 회원이 증가하여 창립 9년째인 1835년에는 150만 명의 정회원을 두게 되었다. 이 무렵 금주운동을 “dry movement”라고도 호칭하고, 반대파, 또는 음주를 할 수 있는 고장이나 법 등을 wet 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 dry운동은 1840년대에 모멘텀을 얻었는데 특히 기독교 경건주의파(개인의 경건한 내면적 심정으로 신앙의 본질을 보려는 신앙적 입장)교당이 선봉에 나섰는데 특히 감리교단과 북부 침례교단이 그 대표적인 교단이었다. 1851년에는 ‘메인 주(State of Maine)’에서 전 주를 dry state(금주 주)로 만들었다. 주류의 생산과 판매를 일체 금지했었다. 결국 이 조치는 인기를 잃어 1856년에 철회되었는데, 때마침 남북전쟁(1861-1865)이 터져서 금주 운동은 지지부진한 상태가 되었다. 전쟁과 술은 붙어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추였다고 할 수 있다.
전후 복구 기간 중인 1881년 캔자스 주에서는 주 헌법으로 금주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이어 남부의 여러 주에서도 따라서 금주령을 선포하였다. 1890~1920년은 정부 행정체제의 재정비, 부패척결 등 정부정화작업이 성행한 시대로써 Progressive Era(혁신적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부패 정치인을 낀 부정행위의 온상이 Saloon(한국의 고급 요정에 필적)이었으므로 사회 일부에서는 Saloon정치의 근절을 위해 Anti-Saloon League(반 주점연맹)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연방금주법 추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부상이 되었다. 당시까지 금주법 지지단체로서는 금주당(Prohibition Party)과 ‘기독교부인금주동맹(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등이 유력했지만 그들을 지배할 정도의 세력을 갖게 되었다. 금주 문제가 사회라던가 도덕적인 범주를 넘어서서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반 주점연맹’의 활발한 dry운동은 정치적인 성격까지 띠고 있었으므로, 1916년의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어떠한 시책도 마찬가지지만 추진파가 있으면 반대파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dry 운동이 가속되면서 dry를 반대하는 wet의 로비활동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Wet파의 주류는 주로 독일계 주민들이였는데, 독일계에는 주류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세계1차 대전(1914.7.28.~1918.11.11.)이 터지게 되어 독일계 wet파의 발언권이 약화되면서 금주령의 의회통과는 거의 확실시 되었다. 당시 미국의 맥주업계는 독일계가 쥐고 있었는데, 지금도 성업 중인 Anheuser-Busch, Coors, Miller, Schlitz 등은 그 시대부터 업계를 지배하고 있던 독일계 양조장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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