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웃의 기인 오손 웰스가 미 역사의 한 괴물인 언론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모델로 만든 ‘시민 케인’(Citizen Kane·1941·사진)은 영화가 다변한 언어이며 개인적 예술적 표현의 용솟음치는 분출구라는 사실을 맹렬하게 보여준 기념비적 작품이다.
26세의 웰스가 제작 감독 주연하고 각본(허만 J. 맨키위츠와 공동)까지 쓴 이 영화는 천재 웰스의 대담한 개혁정신과 실험정신이 천둥번개 치듯 빛과 소리를 내며 창조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 영화비평가들로부터 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허구의 언론재벌인 찰스 포스터 케인이 여러모로 실제 인물인 허스트를 그대로 닮아 큰 화제가 됐었다.
186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외아들 허스트는 절정기에 29개의 신문, 15개의 잡지 그리고 8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했던 언론제국의 황제로 지난 1951년 88세로 사망하기까지 반세기 동안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물론이요 미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허스트의 신문들은 대부분 선동적이요 감각적인 뉴스 위주의 옐로페이퍼에 가까웠다.
걸물이자 가차 없는 모리배에 가까웠던 허스트는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인물로 아내를 두고 만난 할리웃의 젊은 여배우 매리온 데이비스와 사랑을 나누며 자기 애인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코스모폴리탄 픽처스’라는 영화사까지 세우면서 자신의 신문과 방송을 총동원, 할리웃에도 마음껏 입김을 불어 넣었었다.
그는 또 광적으로 전 세계로부터 그림과 조각들을 포함한 온갖 예술품들을 수집해 캘리포니아 중부 소도시 샌시미온 산꼭대기에 허스트 캐슬(사진)이라는 거대한 별장을 세웠다. 허스트가 ‘황홀한 언덕’이라 부른 이 캐슬은 지금은 주립공원이 돼 매년 100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찾아드는데 ‘시민 케인’의 거대하고 음습한 저택 ‘자나두’의 모델이다.
웰스가 스크린에 표현한 케인의 개인적 면모나 사생활 그리고 그의 저택까지가 이렇게 허스트의 그것들을 똑 닮자 허스트는 영화가 개봉도 되기 전부터 자기 부와 권력을 총동원해 영화의 개봉을 저지하려고 애썼었다.
허스트는 자기 신문에 ‘시민 케인’의 광고를 못 내게 하는가 하면 영화 필름을 불태워 버리기 위해 할리웃의 동지를 동원, 필름의 원본을 매입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자기 패를 시켜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이었던 J. 에드가 후버로 하여금 웰스의 뒷조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시민 케인’이 나온 지 70년만이요 허스트가 사망한지 60년만인 오는 3월9일에 이 영화가 샌루이스 오비스포 영화제의 일환으로 허스트 캐슬에 설치되는 5층 높이의 스크린에 상영된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는 듯이 영화의 허스트 캐슬 상영을 전격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것이 허스트 가족 측이다.
허스트 재산관리자인 허스트의 증손자 스티브 허스트는 영화 상영을 통해 자기 할아버지와 케인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 허스트 가족 측의 뜻이라고 최근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스티브는 자기 할아버지는 웰스가 표현한 편집국에서 기자들과 함께 춤을 추는 허풍 떨고 외향적인 케인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면서 특히 영화와 실제가 크게 다른 점으로 허스트의 정부 매리온 데이비스가 모델인 영화 속 수전을 들었다.
영화에서 수전(도로시 카밍고어)은 술에 절은 서푼짜리 오페라 가수로 케인의 허영과 야망에 밀려 오페라 무대에 섰다가 비참한 실패를 한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코미디에 뛰어난 실력파 배우였다. 허스트가 ‘시민 케인’의 개봉을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데이비스에 대한 이런 그릇된 묘사에 분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 영화에서 케인은 “로즈버드”(케인의 어렸을 때 썰매 이름)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쓸쓸히 혼자 죽지만 허스트는 자기와 데이비스가 함께 산 베벌리힐스의 저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런데 웰스는 직접 허스트에게 ‘시민 케인’ 관람을 권했으나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자료에 따르면 이 영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봉되기 전날 웰스는 숙소인 페어몬트 호텔의 엘리베이터에서 허스트와 만났을 때 그를 영화에 초청했으나 허스트로부터 냉랭한 침묵의 답변을 받았다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웰스는 허스트가 자기층에서 내리는 순간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면 초청을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라고 한마디 해줬다고 한다. 쇼맨 웰스 다운 태도다. 귀재 웰스는 ‘시민 케인’으로 마치 제왕처럼 할리웃에 도착했으나 그의 두 번째 걸작인 ‘위대한 앰버슨 가족’으로 과격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자신의 예술성을 만개시키지 못했다.
죽기 전 10여년 간은 포도주 광고(선셋 블러버드에 나붙은 광고를 본 적이 있다)에 나와 찬값을 벌던 그는 좌절되고 미완성인 채 천재성만 남겨놓고 지난 1985년 70세로 할리웃에서 사망했다. 그릇이 너무 커 할리웃이 받아들이지 못한 비극적 거인이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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