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어느 교감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분이 1977년에 버지니아주의 알렉산드리아시의 한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같은 해에 그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티씨윌리암스(티씨) 고교를 졸업했다고 하자 자기 부인이 나의 2년 후배란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얘기는 티씨로 옮겨졌고 그 교감 선생님 부인과 내가 같은 영어 선생님 아래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영어 선생님은 아직도 티씨에서 40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패트릭 웰쉬 선생님이다. 이 분은 워싱턴포스트와 유에스에이 투데이 등의 신문에도 가끔 칼럼을 기고하시는, 잘 알려진 교육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나는 웰쉬 선생님에게 배우면서 참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당시 미국에 온지 일 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아 영어 공부로 많은 고생을 하던 나를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다. 영어 발음에 힘들어 할 때 격려도 해주시고, 단어 공부에 더 박차를 가하라고 추가로 배워야 할 단어들을 선정해 녹음기에 발음까지 녹음해 주시던 분이었다. 어느 날 반에서 영어동사 끝에 ‘ing’가 붙어 명사 형태로 쓰이는 것을 무어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나 혼자 손을 들어 ‘gerund (동명사)’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 태어난 토박이 학생들에게 정신 좀 바짝 차려야 되겠다고 훈계를 하시면서 말이다. 웰쉬 선생님이 1986년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겪었던 일들을 얘기로 묶어 책을 출판하셨을 때엔 나에 대한 일화를 그 책에 소개하시기까지 하셨다.
내가 버지니아주 훼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에 처음 출마하던 1995년 때였다. 선거를 준비하면서 홍보물에 담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유명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후원 요청을 하게 되었는데 웰쉬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래서 하루는 약속을 하고 티씨로 선생님을 찾아가 뵙고 인사드렸다. 이미 당시에 나는 임명직 교육위원이었기 때문에 나의 선거 출마는 언론보도를 통해 선생님이 인지하고 계셨다.
선생님께 선거출마 인사를 정식으로 드리고 후원하시는 분으로 홍보물에 포함시켜도 좋겠느냐고 정중하게 여쭤보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선생님은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이 있고 고등학교 때 미국에 이민 와서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일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하시면서도 후원자 명단에 올리는 것은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에 대해 주위에서 자신에게 물어 보거나 기회가 있을 때 좋은 말을 해주겠지만 교육 칼럼니스트로서의 당신의 위치를 고려할 때 공식적인 후원은 적절하지 않다는 말씀이었다. 나의 교육 정책을 확실히 파악할 기회도 없었고, 다른 후보자들을 제대로 살펴보기 전에 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일도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셨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내가 꼭 당선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말이다. 그냥 개인적 친분으로 해주실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었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나도 가끔 대학입학이나 취직 관계로 추천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런데 요청을 수락할 수 없는 경우도 자주 있다. 추천 대상자를 전혀 모르거나 가까이서 충분한 기간 동안 관찰할 기회가 없었던 경우들이 그렇다. 또한, 실제로 추천할 만한 자질을 갖고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때로는 신상에 대한 정보를 전부 적어 가지고 올 테니 그 것을 바탕으로 써달라거나, 심지어는 자기가 써올 테니 그냥 사인만 해줄 수 없겠느냐는 무리한 부탁을 받기도 한다. 추천서를 써주는 사람이 추천 대상자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쓰는 것은 사실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모님을 안다고 해서 그들 자녀의 추천서를 써 줄 수도 없고 추천할만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데 단순히 서로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용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게 쓸 수도 없다.
미국에서 대학 입학사정 때 추천서가 갖는 중요성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험이나 학교 성적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는데 가까이서 살펴본 사람의 솔직한 평가만큼 도움이 되는 도구도 없다. 그래서 그 만큼 추천서의 공정성도 요구된다. 추천서의 내용이 친분에 좌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추천서의 공정성이 훼손되기 시작할 때 결국은 이에 의존해야 하는 시스템의 붕괴는 예측이 어렵지 않다. 추천서를 의뢰하는 사람이나 추천서를 쓰는 사람 모두 이러한 점을 인식한다면 무리한 부탁이나 솔직하지 않은 추천서 작성도 없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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