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자 한국판 신문 1면에는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두 여성이 나란히 앉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만남이었다.
비리와 부패 스캔들, 파당과 대립으로 아수라장인 정치판을 이끌고 총선과 대선을 치러내며 한국정치의 다음 장을 열어야할 주인공들이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집권당과 제1 야당의 대표로 마주 섰다. ‘여성 당수’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여기자들의 모임이 수유리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여성의 정치력 신장을 주제로 한 웍샵이었던 것 같다. 선거에 여성 후보가 출마할 경우 언론, 특히 여성 언론인들은 그를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언론의 불편부당 원칙에 따라 특정 후보를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남녀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을 지원해 남녀평등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었다. 논쟁은 격렬했다. 그래서 양측이 얼굴을 붉히며 대립한 채 토론을 접었지만 한편으로 ‘가상’의 허망함이 있었다.
여성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가상’일 뿐 현실로 가정하기 어려웠다. 30여년 전 여성들에게 한국의 정치무대는 풀 한포기 돋기 어려운 사막이었다.
여성 후보에 대한 지원이 ‘가상’ 아닌 ‘현실’로 논쟁의 이슈가 된 것은 10년 전, 2002년 봄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여성운동의 성과,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여성지원 정책으로 당시 여성의 정계진출은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2000년 16대 국회에는 여성의원이 16명이나 진출했다.
그 중 한명이 박근혜 의원이었고, ‘박정희 향수’와 함께 인기가 상승하면서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여성계로 볼 때 ‘여성 대통령’은 두손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당시 여성계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주인공이 박근혜였기 때문이었다. 발단은 시사 월간지 ‘말’에 실린 ‘박근혜를 찍어야 진보다’라는 센세이셔널 한 제목의 글이었다. 글을 쓴 젊은 여성주의자는 여성이 선거에서 이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지적하며 여성 정치인을 ‘멸종 위기의 동물’에 비유했다.
“멸종 위기의 동물은 그게 해충이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여성 중 ‘대통령 후보’에 가장 근접한 박근혜를 여성들이 다같이 지지해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찬성하는 측은 “현재로서 박근혜밖에 없다”는 현실을 수용했다.
반대하는 측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개발 독재와 보수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인 ‘독재자의 딸’을 ‘여성’의 이름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고위직이나 정계에 진출하는 길은 보통 두가지였다. 첫째는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 박근혜 케이스이다. 둘째는 일종의 카드. 정치권이 국면전환용으로 ‘여성’을 차용한 케이스들이다. 지난 2006년 한명숙이 최초의 여성 총리로 발탁된 것 역시 이런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지방선거를 앞둔 노무현 정권이 돌아설 대로 돌아선 민심을 돌리기 우해 ‘여성 총리 1호’라는 카드로 분위기 쇄신을 시도했다는 분석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여성 정치인이 권력투쟁의 거친 정치판에서 기어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살아남아서 ‘여성’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양당 대표로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여성 대통령’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닌 실현 가능성 높은 현실로 다가들고 있다. 70년대 크리스천 아케데미에서 벌어진 토론으로부터 여성들은 참 먼 길을 달려왔다.
21세기는 3W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화(World), 웹(Web), 그리고 여성(Women)이다. 인류는 남성 리더십으로 농경시대와 산업시대를 통과했다. 앞장서서 ‘돌격! 전진!’을 외치는 힘과 권위의 리더십이었다. 네트웍으로 전 세계가 연결된 정보시대에는 다른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포용과 화합의 리더십이다. 권위적 ‘아버지’보다는 배려하고 보듬어 안는 ‘어머니’가 돋보이는 시대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리더십이 부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 당수’ 시대는 한국에서 여성 리더십을 제대로 시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두 여성 지도자들의 성공을 빈다. 그래서 ‘여권신장’ ‘남녀차별’ 혹은 ‘남녀평등’이라는 단어들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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