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정 희 논설위원
온순하던 아이가 말을 안 듣고 툭하면 화를 낸다. 용돈을 너무 자주 달라고 한다.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 게임만 한다. 집안에서 라면이나 과자 같은 간식거리들이 너무 빨리 없어진다. 아이의 몸에서 가끔 멍이 발견된다.
13살짜리 아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부모는 어떤 생각을 할까? ‘사춘기라서’ ‘한창 먹성 좋을 나이니’ ‘남자아이들이 과격하게 놀다보면’ ‘저러다 철들겠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중학교 2학년짜리에게 심각한 어떤 일이 있으리라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특히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부부들은 아침에 잠깐, 저녁에 잠깐 자녀를 대하면서 웬만한 변화는 눈치도 채지 못한다. 요즘 한국에서 많은 가정의 현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 가정의 현실이다. 그런 방심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한국에서 터졌다.
대구에서 급우들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지난 20일 한 중학생이 자살을 했다. 위의 모습을 보인 아이에게 그 부모 역시 야단만 쳤을 뿐 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부부 교사인 그 부모가 지금 땅을 치며 자책하는 부분이다. 왜 좀 더 유심히 살피고,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안 하던 컴퓨터 게임하고 용돈도 자주 달라고 한 이유가 괴롭힘 때문이었다니 가슴이 무너진다”고 부모는 오열했다.
소년은 지난 9개월 지옥 속에 홀로 버려졌었다. 같은 반 학생 두세 명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가해학생들의 구타와 모욕은 날로 심해져 지난 19일 극에 달하고 소년은 그날 밤 자살을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부모가 출근하자 평소 엄마가 핸드백을 두는 자리에 밤새 쓴 유서를 놓아두고, 거실을 깨끗이 정돈한 뒤 아파트 7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 …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 엄마, 아빠 사랑해요!!!!”
A4 용지 4장을 빽빽하게 메운 소년의 유서는 제3자가 읽어도 억장이 무너진다. 아이가 당한 고통을 구구절절 읽으면서 그 부모는 단장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포악할까.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이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90년대 남아공에서는 난폭한 코끼리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전국 공원의 코끼리들이 마구 날뛰며 코뿔소 등 다른 동물들을 죽였다. 현장을 살핀 동물학자들은 그 10여년 전 실시된 코끼리 이주 작전이 과오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0년 전후 남아공은 특정지역에 몰려있는 코끼리들을 전국의 공원에 고루 배치하기 위해 이주 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늙은 코끼리들은 빼고 어린 코끼리들만 추렸는데 그들이 10대가 되면서 문제가 터졌다. 코끼리는 나이 많은 수컷을 우두머리로 위계질서 속에 무리지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데 모두 고아가 된 코끼리들이 본받을 어른 없이 저희끼리 자라다 보니 난폭한 천둥벌거숭이가 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야만인이어서 분명한 지침을 주며 훈육해야 바른 시민이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성악설이다. 도덕심도 체력처럼 훈련에 따라 길러지기 때문에 아이들의 윤리교육은 필수라고 그는 강조했다.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이후 한국은 교내폭력 예방 논의로 시끌시끌하다.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강화, 상담교사 배치 등 모두가 필요한 조치들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이 어른의 감독 없이 방치되어 자라는 현실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어른 있는 가정이 드물다. 미주 한인사회에는 특히 ‘나 홀로’ 아이들이 많다. 그 빈 시간, 빈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대구의 중학생도 방과 후 혼자 집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와서 괴롭힌 것이었다.
윤리교육은 입시교육에 밀려나고 훈육을 맡을 어른들은 일터로 밀려났다. 그 틈새를 타고 남을 괴롭히는 못된 아이들도, 괴롭힘에 죽어가는 가엾은 아이들도 생겨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단하게 일을 하고, 아이들을 등 떠밀어 공부시키는가. 아이들의 행복이 목적이라면 뭔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도, 국가도 새해에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으면 한다.
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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