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을 즉시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익숙지 않은 것을 대할 때면 그 것에 즉시 반동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도 그래서 처음에는 괄시를 받았고 지금은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클래시컬 음악도 초연 때 청중과 비평가들의 반감을 산 것들이 적지 않다.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라이프치히에서 연주됐을 때 청중의 야유와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도 비평가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이로 인해 라흐마니노프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클래시컬 음악팬들의 올 타임 페이보릿이 되다시피 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도 처음에는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심지어 베토벤의 음악도 청중들로부터 너무 혁명적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들었다.
그래서 LA필을 비롯한 굴지의 교향악단들은 신곡이나 현대 음악을 소개할 경우 청중이 잘 아는 곡과 함께 프로그램을 짜곤 한다. 이런 방법은 LA필을 미 굴지의 오케스트라로 올려놓은 에사-페카 살로넨 전 LA필 상임지휘자가 자주 사용했다.
지난달 25일에 살로넨의 바통 하에 LA필이 연주한 신곡 ‘사이렌스’(Sirens)도 역시 이런 신·구곡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스웨덴 작곡가 안더스 힐보그가 작곡해 이 날 세계 초연된 ‘사이렌스’를 들으면서 내가 놀란 것은 생전 처음 듣는 현대음악이 도무지 귀에 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실험과 전통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작곡의 과정에서 항상 서로 엮어져 있다”는 힐보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이렌은 희랍신화에 나오는 치명적인 바다 요정들. 이들은 배가 지나 갈 때면 유혹적인 노래를 불러 이에 홀린 뱃사람들을 유인, 배가 바위에 충돌하면서 뱃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다. 사이렌은 그러니까 남자들을 유혹해 멸망시키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사이렌의 유혹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단 하나 예외가 간교하고 의심 많은 율리시즈다. 트로이전쟁 후 고향 이타카로 항해 중이던 율리시즈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어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봉하게 하고 자기 몸은 돛대에 묶어 놓고 살인적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살아남는다.
이런 내용은 호머의 ‘오디세이’에 기록돼 있는데 이 얘기는 영화 ‘율리시즈’(Ulysses·1955)에서 아주 재미있고 생생하게 재현된다. 나는 이 영화를 중학생 때 서울 명동극장에서 봤는데 율리시즈로 나온 수염이 잔뜩 난 커크 더글러스(사진)가 돛대에 매인 채 사이렌의 노래에 홀려 몸부림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힐보그의 ‘사이렌스’도 이 얘기를 묘사한 것으로 오케스트라와 합창 그리고 소프라노(힐라 플리트만)와 메조-소프라노(안네 소피 폰 오터)를 위한 곡이다. 연주시간은 30분 정도.
연주 제1부는 베토벤의 오페라 ‘레오노레’ 서곡 제2번과 에마누엘 액스가 독주자로 나온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실은 제1번보다 먼저 작곡됐다)으로 마련됐다. 살로넨이 보기 드물게 역동적인 지휘를 했는데 액스의 피아노 연주는 사뿐하고 따스하며 서정적이었다.
‘사이렌스’는 현들의 집합 음들로 시작됐는데 바다의 침묵과 무게와 함께 음들이 반복되면서 파도의 반복되는 드나듦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어 합창단이 속삼임과 두런대는 소리를 내면서 사이렌들이 소리의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사이렌들의 노래는 두 소프라노와 합창단이 서로 번갈아 가며 부르거나 함께 부르는데 특히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비명과도 같은 플리트만의 노래와 폰 오터의 가라앉은 노래가 절묘한 대조를 이루며 청중을 유혹했다.
이들이 율리시즈를 유혹하느라 간청하고 호소하고 또 자극하면서 반복하며 부르는 노래는 마치 바다귀신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으스스하고 현혹적이었다. 율리시즈를 찬양하고 꼬이는 노래 구절 중에서 도드라지게 신식인 것이 “우리는 기꺼이 당신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자(turn on) 해요”라는 말이다. ‘Turn on’이라는 말이 아주 노골적이요 이색적이다.
바다를 느끼게 하는 푸른 조명 속에 두 소프라노의 달콤하면서도 강력한 유혹의 노래는 합창단의 “쉬쉬”하는 속삼임과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교차되면서 괴이하고 혼미한 기분을 자아냈다. 음으로 그린 율리시즈의 유혹의 얘기가 아슬아슬하게 자극적이다. 귀기마저 서린 아름다운 음악으로 특히 반복음의 매력을 새삼 다시 한 번 즐겼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이 생각난 것도 그 때문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