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란 나는 종이로 예쁜 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나뭇잎사귀를 그릇 삼아 돌멩이와 흙으로 양념한 음식을 반질반질한 큰 돌 위에 한 상 떡 부러지게 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랫집 영식이 하고 마주 앉아 “이것도 좀 자셔 보시오” 하면서 이파리 위에 올린 돌멩이 반찬을 그의 앞으로 끌어당겨 놓았다. 그러면 영식이는 목에 힘을 꽉 주고 앉아 짐짓 위엄 있는 목소리로 “으음, 나물이 아주 맛나네” 하고 말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집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을 차지하고 있는 장독대에 올라 어슬렁거렸다. 장독대에는 간장, 된장, 그리고 고추장을 담고 있는 늙은 항아리들이 아침부터 햇빛을 앞치마에 가득 모아 담아 두고 있었다. 특히 공기의 손길이 아직 쌀쌀맞고 햇빛은 실없는 웃음을 실실 흘리는 봄, 가을이면 늙은 항아리의 뜨뜻한 품이 일품이었다. 특히 빈 항아리는 덩치 큰 친구이자 장난감이고 엘리스 원더랜드와 같은 신비로움으로 넘쳐 났다.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린 매듭으로 뚜껑이 덮인 독을 톡톡 치면 빈 항아리를 쉽게 가려낼 수가 있었다. 빈 항아리는 나의 노크 소리에 굵은 물방울이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날 화들짝 반겼다. 그렇지 않고 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는 약간은 짜증스럽고 귀찮은 듯 틱틱거렸다. 마치 배부르게 먹은 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 때 보이는 귀찮다는 반응 같은 거. 날 귀찮아하는 항아리를 만나면 조금은 시무룩하고 샐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얼른 그 다음 항아리로 옮겨 갔다. 그러다가 빈 항아리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빈 항아리에게 묻지도 않고 엄마의 허리 사이즈보다도 더 퉁퉁한 허리에 등을 대고 앉았다. 빈 항아리는 내 등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그 손길이 꼭 외할머니 손길과도 같았다.
그리고 퉁퉁한 허리 사이즈만큼이나 성품도 넉넉했다. 결코 짜증내는 법이 없었다. 가운데 손가락으로 통통통 두들기다가 지루해지면 작은 돌멩이로 딱딱 두들겼다. 딱딱 부딪히면서 허옇게 생채기가 났지만, 괜찮다 했다. 아버지가 꼬아놓은 새끼줄을 갔다가 빈 항아리 목에 묶고, 새끼줄 사이사이에 단풍잎 꽂아 놓으면, 오랜만에 입어 보는 치마에 얼굴이 배시시 붉어지기도 했다. 때론 퉁퉁한 항아리 허리에 한 쪽 새끼줄을 묶어 놓고, 다른 한 쪽은 저만큼 떨어져서 우리가 놀고 있는 모습을 멀뚱히 구경하고 있는 나뭇가지에 질끈 동여 메고 폴짝폴짝 뜀뛰기를 하기도 했었다. 어쩌다가 발목이 새끼줄에 걸려 나뭇가지는 휘청거려도 퉁퉁한 빈항아리는 꿈쩍도 안했다.
그런 놀이가 시들해지면, 이제 빈 항아리 뚜껑을 열어 젖혔다. 허리를 항아리 주둥이에 걸치고 상체를 컴컴한 항아리에 쑥 집어넣었다. 빈 항아리의 체취는 쿰쿰했다. 비릿한 멸치젖 냄새와 꼬릿꼬릿한 장 냄새가 콧구멍으로 훅 밀려왔다. 처음엔 향기롭지 못해도 잠시 그대로 있으면 내 후각도 더 이상 호들갑 떨기를 멈추었다. 그러면 난 엘리스처럼 신비의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흑흑거리면 빈 항아리는 나보다도 더 슬프게 울어주고, 내가 깔깔깔 웃으면 그도 더 즐겁고 크게 웃었다. 콩쥐 팥쥐 이야기를 해 주면, 구경꾼까지 데리고 와 우우 와와 소리도 질러 주었다. 그러면 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려 벌개진 얼굴도 개의치 않고 더욱 더 깊숙이 항아리 품에 안겨 들어갔다.
그렇게 나와 친구가 되어 주던 빈 항아리가 어느 날엔가는 장을 가득 머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주와 까만 숯이 으스대며 동동 떠 있었다. 맥없는 표정으로 그 항아리를 가운데 손가락 매듭으로 톡톡 치자 항아리가 틱틱거렸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거리는 장과 된장 그리고 숯덩이 하고 놀기도 바쁘다는 표정이었다. 숙성이 잘 된 장과 된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때론 금전으로 환산된다는 것도 빈 항아리는 알고 있다는 듯 뻐기는 태도였다. 그런 표정과 태도에 난 그만 풀이 푹 죽어 항아리를 기대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어릴 적 내 친구 빈 항아리는 이제 내 안에 있다. 내가 그를 찾아가기보다는 그가 날 찾아오는 경우가 더 잦다. 살아가면서 입을 뚱 내밀고 지직거리는 소음을 내면, 빈 항아리가 내 안에서 톡톡 노크를 한다.
이성애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