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인간관계의 인연을 겁(劫)에 비유하는데, 겁이란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사방 1유순(약 15km)의 바위를 뚫는 시간, 또는 사방 1유순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서 100년에 한 번씩 겨자씨를 꺼내 강물에 빠뜨려 그 겨자씨를 다 비워 낼 시간이라고 한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랜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지구 안의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태어날 만한 인연이 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하루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부부가 되려면 7000겁의 인연이, 부모 자식은 8000 겁의 인연이, 형제자매가 되려면 9000 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손녀와 할머니, 할아버지로 만나려면 도대체 몇 겁의 인연이 있어야할까? 적어도 10,000겁의 인연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기가 막힌 인연으로 손녀가 우리 품에 안겨졌다. 아가는 얘기가 하고 싶은 얼굴을 하고 할머니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주 자세히 올려다본다. 아가는 음치 할머니가 불러주는 ‘섬집 아기’에 앙코르를 청하고 청하고 또 청한다. 앙코르를 청할 때 마다 1절, 2절을 다 부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가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어려서 예쁜 애가 크면서 덜 이뻐지는데...”라고 쓸 데 없는 걱정을 한다. 아가엄마 몰래 우유 반병을 더 먹이고 어깨에 얹어 트림을 시키면서 아가에게 갖은 아부를 다 하며 꼬드긴다. 드디어 트림을 하면 할아버지는 아가가 노벨상이라도 받은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구, 장하다, 이쁜 우리아가!” 한다.
이틀 째 똥을 안 누니 아가 엄마는 변비라고 걱정을 하며 병원에 데리고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울상이다. 다음 날, 아가는 보란 듯이 몽글몽글하게 예쁜 똥을 한 바가지 눈다. 기저귀 밖으로 뭉그러져 나와 옷과 요에도 묻힌 아가 똥을 보면서 온 식구들이 박수를 치고 난리굿을 한다.
아가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의 한 옥타브를 치고도 남고, 한 달도 안 된 머리가 탐스럽고 길어 곧 헤어컷을 해야겠다고 뻥을 치면서,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거라고 한 소설의 대목을 떠올린다.
‘제 몸보다 작은 껍질을 찢고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이. 펑! 펑! 환호하며!
잠이 들어도 침대에 누이지 못하고 들여다보며 노파심이 스멀스멀 몰려오기도 한다. 뉴욕 맨해턴 한복판에서 자라는 꼬맹이들의 소식을 간간히 전해 들어 온 탓이리라. 3살배기한테 스페인어 레슨을 시키고, 4살배기한테 개인 테니스 레슨을 시킨다는 소리를 선배 할머니들한테 전해들은 게 생각나는 것이다.
나는 이 기막힌 나의 인연에게 말한다. 아가야, 개구쟁이 산복이만 닮거라. 센추럴 공원을 맘껏 뛰어다니면서 그렇게 씩씩하게 자라거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마에 땀방울 송알송알/ 손에는 땟국이 반질반질/ 맨발에 흙먼지 얼룩덜룩/ 봄볕에 그을려 가무잡잡/멍멍이가 보고 엉아야 하겠네/ 까마귀가 보고 아찌야 하겠네.(이문구의 동시 ‘개구쟁이 산복이’)
그리고 엄마 심부름도 잘 하는 아가가 되거라:
아기가 아기가/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점 반이다./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점 반/ 넉전 반”/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점 반이래.” (윤석중의 동시 ‘넉점 반’)
아가의 엄마, 아빠가 알면 할머니에게 아가 접근 금지령을 내릴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하고 야무진 꿈을 꿔보는 것이다.
나는 이 기가 막힌 나의 인연에게 이 세상 사물들의 비밀을 가르쳐줄 것이다. 꽃씨 속에 숨어있는 파아란 잎을, 빠알간 꽃을, 그리고 노오란 나비 떼도. 그리고 별들은 무얼 먹고 사는지도. ‘ABC’ 보다 ‘가나다라’를 먼저 깨우쳐줄 것이다. 함께 ‘곰 세 마리’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으쓱으쓱하면서 “히쭉히쭉 잘한다” 하는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릴 것이다.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할머니가 되어줄 것이다.
괜찮아~, 다음번엔 더 잘 할 수 있어....... 괜찮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괜찮아~, 너는 다른 것을 더 잘할 수 있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환하게 웃을 수 있으면 돼
이영옥 / 대학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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